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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에는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에 따라 일본 미쓰비시 전기와의 합작회사 형태로 [[삼우전기]]를 설립하면서 각종 공장 기계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 1974년에는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에 따라 일본 미쓰비시 전기와의 합작회사 형태로 [[삼우전기]]를 설립하면서 각종 공장 기계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 ||
1975년에는 삼우그룹의 모기업인 [[삼우(기업)|삼우물산]]이 국내 최초로 종합상사 1호로 지정을 받아 국내 무역업계 대표주자로 떠올랐다. 이로써 삼우그룹과 계열사의 각종 수출업무는 삼우물산으로 일원화되어 보다 큰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1978년에는 경향화재와 대원증권의 상호를 [[삼우화재]], [[삼우증권]]으로 바꾸었다. 이어 삼우물산의 상호를 [[삼우(기업)|㈜삼우]]로, 중앙토건주식회사와 차세대백화점을 [[삼우(기업)|㈜삼우]]에 합병한다. 이로써 [[삼우(기업)|㈜삼우]] 중심이 된 무역·건설·유통 분야, [[삼우화학]]이 중심이 된 화학·소재 분야, [[삼우전기]]가 중심이 된 | 1975년에는 삼우그룹의 모기업인 [[삼우(기업)|삼우물산]]이 국내 최초로 종합상사 1호로 지정을 받아 국내 무역업계 대표주자로 떠올랐다. 이로써 삼우그룹과 계열사의 각종 수출업무는 삼우물산으로 일원화되어 보다 큰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1978년에는 경향화재와 대원증권의 상호를 [[삼우화재]], [[삼우증권]]으로 바꾸었다. 이어 삼우물산의 상호를 [[삼우(기업)|㈜삼우]]로, 중앙토건주식회사와 차세대백화점을 [[삼우(기업)|㈜삼우]]에 합병한다. 이로써 [[삼우(기업)|㈜삼우]] 중심이 된 무역·건설·유통 분야, [[삼우화학]]이 중심이 된 화학·소재 분야, [[삼우전기]]가 중심이 된 중공업·기계 분야, [[삼우화재]], [[삼우증권]]이 중심이 된 금융 분야 등에 걸쳐 사업을 펼쳐나갔다. | ||
1984년에는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화하며 미국 유학파를 대거 스카우트하고 [[삼우일렉트론|삼우전자]]를 설립한다. 설립 초기에는 라디오, 계산기 등 간단한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주로 생산했으나 사업 성장은 쉽지 않았고, 미국과 일본의 기업들이 공고하게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장 진입 전략도 마땅하지 않았다. 이때 설계부터 제조까지 도맡아 했던 다른 거대 반도체 기업과 달리 위탁생산에만 전념하는 파운드리 사업이 유망하다는 점을 간파하여 1988년에 반도체 위탁생산업체 [[삼우파운드리|삼우반도체]]를 설립한다. 또한 필립스와의 기술 제휴를 통해 [[삼우일렉트론|삼우전자]]도 B2C 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B2B 반도체 장비 업체로 전환에 성공한다. | 1984년에는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화하며 미국 유학파를 대거 스카우트하고 [[삼우일렉트론|삼우전자]]를 설립한다. 설립 초기에는 라디오, 계산기 등 간단한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주로 생산했으나 사업 성장은 쉽지 않았고, 미국과 일본의 기업들이 공고하게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장 진입 전략도 마땅하지 않았다. 이때 설계부터 제조까지 도맡아 했던 다른 거대 반도체 기업과 달리 위탁생산에만 전념하는 파운드리 사업이 유망하다는 점을 간파하여 1988년에 반도체 위탁생산업체 [[삼우파운드리|삼우반도체]]를 설립한다. 또한 필립스와의 기술 제휴를 통해 [[삼우일렉트론|삼우전자]]도 B2C 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B2B 반도체 장비 업체로 전환에 성공한다. |
2024년 12월 4일 (수) 05:3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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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 三友 | SAM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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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대한민국 |
창립일 | 1908년 6월 28일 (116주년) |
창업주 | 신익상 |
회장 | 신동호 |
분야 | 석유화학, 중공업, 반도체, 금융, 유통, 미디어 |
기업 규모 | 대기업 |
소재지 | 삼우본관빌딩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76 (신문로1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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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삼우물산을 주축으로 한 대한민국의 기업집단이다.
역사
태동기
창업주 신익상이 1919년 종로에 귀금속, 양품잡화, 화장품, 학용품 등을 취급하는 동화상점(同和商店)이라는 잡화점을 개점한 것이 그룹의 모태이다.
당시 한국인 상점들은 제조 공장에서 직접 상품을 수입하지 못하고 서울의 일본 도매상에게 상품을 공급받아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상인들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신익상은 경험이 많은 점원을 오사카에 보내 상주토록 하고 일본 공장 제품을 직수입하였다. 이렇게 신익상의 동화상점은 좋은 상품을 값싸게 판매한다는 소문이 시중에 퍼지면서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잡화상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이어 1924년에는 경영난에 빠진 '계림상회'를 인수하여 사업을 확장하는 한편 함흥, 대구, 전주, 광주, 나주, 순천, 목포에 지점을 설치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1931년에는 종로에 4층 건물을 전세로 얻어 경성백화점을 개점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첫 번째 백화점이었다. 그러나 경성백화점은 여전히 일본인이 경영하는 미쓰코시나 조지야 백화점에 비해 규모나 자본력에서 열세였을 뿐만 아니라 고객 유치 방법도 뒤떨어졌다.
신익상은 경성백화점을 미쓰코시 백화점 못지않은 현대식 백화점으로 만들기 위하여 점포 내의 진열과 장식에 특히 중점을 두어 개선하였다. 또한 200여 종업원을 모두 일본인 백화점의 종업원에 뒤지지 않게 훈련시켰고, 손님을 대할 때도 친절하게 하도록 교육하였다. 종업원 중 절반을 여성으로 채용한 다음 그들에게 깨끗한 의복을 입혀 손님에게 친절과 봉사를 다 하도록 힘썼다. 이러한 친절과 서비스 정신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경성백화점의 특색은 품질이 좋은 제품을 값싸게 판매한다는 전략이었기 때문에 오사카, 고베 방면의 직수입망을 더욱 튼튼하게 하였다.
1932년에는 만 2년 동안 유지되던 금본위제가 폐지되는 바람에 곧바로 일본에서의 금 수출이 금지되었다. 이 조치로 금은 등 귀금속과 여타 상품의 가격이 치솟았다. 금은을 중심으로 하는 경성백화점은 매장과 창고에 잔뜩 쌓였던 재고품으로 전에 없던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제조업 진출
창업주 신익상은 남들보다 훨씬 앞서 상업계에 진출한 인물이었지만, 일본 오사카 공장에서의 물품 직수입, 상품권 발행, 금전 등록기 설치, 주택을 상품으로 주는 등의 대담한 상행위로 새로운 경영 방법을 구사하는 경쟁사들이 등장하면서 사세가 위축되기 시작했다. 신익상은 백화점만으로 사업은 힘들다고 판단, 새로운 사업을 발굴하던 중 수입해 온 일제 화장품들이 소비자의 호응을 얻던 것을 떠오르며 화장품 생산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한다.
1938년 조선약품 설립 후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던 미안수를 자가 제조법으로 만들어 판매했고 구리무, 가루분 등으로 화장품 제조의 종류와 폼목을 넓혔다. 가내수공업 화장품이 품질이 우수하다는 입소문을 타 큰 인기를 끌었으나 화장품 용기가 뚜껑이 잘 깨지는 재질이어서 사용이 불편한 문제가 있었다. 당시 국내에는 합성수지가 생산되지 않는 상황이었고, 플라스틱이란 말도 생소한 때라 깨지지 않는 화장품 용기를 만드는 일을 알아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1942년 조선화학공업사를 설립하고 미국에서 사출성형기 한 대를 도입해 깨지지 않는 화장품 용기를 개발한다.
이때 신익상은 플라스틱에 대한 이해만 높이면 칫솔, 빗 등의 생활용품을 만들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화장품 용기 개발을 계기로 주력사업을 플라스틱으로 바꾸고 1945년 국내 최초의 플라스틱 빗을 출시했다. 가볍고 사용하기 편리하다 보니 시장의 인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먼저 물건을 받으려는 상인들이 연일 장사진을 이루었고, 물건을 싣고 가다 외국산 밀수품으로 오해를 받아 곤욕을 치르는 도매상도 있을 정도였다. 이후 세숫대야, 일반 식기류, 비닐 장판 등 생활용품부터, PVC 파이프, 폴리에틸렌 필름 등 산업용 제품까지 다양한 플라스틱 제품을 시장에 선보이며 플라스틱 가공사업으로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갔다.
성장기
광복 이후 6.25 전쟁이 벌어지자 막대한 손해를 얻은 신익상은 임시 수도였던 부산으로 피난간 후 남은 종잣돈으로 삼우물산을 설립한다. 삼우물산은 당시 한국전쟁 중에 전투지역에 있던 탄피나 버려진 무기들을 제2차 세계대전의 물자 징발 여파로 쇠가 부족했던 일본에 팔고, 다시 일본에서 벌어들인 달러로 중국에서 설탕과 비료를 수입해 국내 시장에 공급, 사업 6개월 만에 삼우물산은 10억 원이 넘는 이익을 올렸으며 1년 뒤에는 무려 60억 원의 재산을 쌓으면서 단숨에 재기에 성공한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전국 곳곳에 널려 있던 구리 탄피들을 긁어모아 이를 재수출하는 사업까지 하면서 돈을 갈쿠리로 쓸어담았다고 한다.
1954년에는 사실상 폐업 상태였던 조선약품과 조선화학공업사를 삼우화학으로 재출범하고, 장차 건설시장이 커질 것이란 확신으로 중앙토건주식회사를 인수하면서 건설업에도 진출한다. 전쟁이 끝난 후 복구공사가 본격화하면서 중앙토건주식회사는 건설특수에 따른 호황을 톡톡히 누렸다. 경성백화점도 대규모의 현대식 백화점으로 전환하기 위해 건물 증축, 수리 공사에 착수하고, 1962년 차세대백화점으로 명칭을 바꾸며 영업 방식 또한 임대에서 직영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1964년에는 기획조정실을 신설하면서 다방면에 걸쳐 계열사를 설립하였다. 1965년에 경향화재와 대원증권을 인수해 금융업에 진출하였고, 1967년에는 정부가 제2정유공장 설립에 따라 영국의 로열 더치 쉘과 합작회사 형태로 삼우정유를 설립한다. 1970년 신익상 회장이 타계한 후 신익상 회장의 장남인 신영민이 2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중화학부문·중장비 등의 공업구조의 고도화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에 따라 일본 미쓰비시 전기와의 합작회사 형태로 삼우전기를 설립하면서 각종 공장 기계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75년에는 삼우그룹의 모기업인 삼우물산이 국내 최초로 종합상사 1호로 지정을 받아 국내 무역업계 대표주자로 떠올랐다. 이로써 삼우그룹과 계열사의 각종 수출업무는 삼우물산으로 일원화되어 보다 큰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1978년에는 경향화재와 대원증권의 상호를 삼우화재, 삼우증권으로 바꾸었다. 이어 삼우물산의 상호를 ㈜삼우로, 중앙토건주식회사와 차세대백화점을 ㈜삼우에 합병한다. 이로써 ㈜삼우 중심이 된 무역·건설·유통 분야, 삼우화학이 중심이 된 화학·소재 분야, 삼우전기가 중심이 된 중공업·기계 분야, 삼우화재, 삼우증권이 중심이 된 금융 분야 등에 걸쳐 사업을 펼쳐나갔다.
1984년에는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화하며 미국 유학파를 대거 스카우트하고 삼우전자를 설립한다. 설립 초기에는 라디오, 계산기 등 간단한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주로 생산했으나 사업 성장은 쉽지 않았고, 미국과 일본의 기업들이 공고하게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장 진입 전략도 마땅하지 않았다. 이때 설계부터 제조까지 도맡아 했던 다른 거대 반도체 기업과 달리 위탁생산에만 전념하는 파운드리 사업이 유망하다는 점을 간파하여 1988년에 반도체 위탁생산업체 삼우반도체를 설립한다. 또한 필립스와의 기술 제휴를 통해 삼우전자도 B2C 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B2B 반도체 장비 업체로 전환에 성공한다.
1989년 삼우전자의 상호를 삼우일렉트론으로 바꾸고, 이어 1990년 3월에는 한국신용카드사를 인수, 1993년에 삼우카드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1993년 신동호 회장이 타계한 뒤 신동호 회장의 장남인 신재민이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삼우그룹은 3세 경영이 시작된 1990년대에 '신경영 체제'을 내세우며 계열사의 설립 및 인수 · 합병을 진행하였다. 1995년 삼우반도체의 상호를 삼우파운드리로 바꾸고, 삼우화학의 생활화학사업부문을 삼우생활건강으로 분할한다.
경영진
회장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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