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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우그룹 제3대 회장 신영철 申英哲|Shin Young-chu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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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43년 6월 17일 |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 |
| 국적 | |
| 본관 | 평산 신씨 (平州 申氏) |
| 부모 | 아버지 신덕균, 어머니 이순자 |
| 형제자매 | 2남 1녀 중 차남 |
| 배우자 | 이현희 |
| 자녀 | 장남 신동호 차남 신동식 장녀 신혜영 |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삼우그룹의 제3대 회장이다.
생애
1943년 6월 17일 서울 성북동에서 삼우그룹 제2대 회장 아버지 신덕균과 어머니 이순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그는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하였다. 이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스쿨에서 MBA 과정을 수료하며 재무 기획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쌓았다.
귀국 후 1970년대 중반부터 삼우그룹 내 금융 및 중공업 계열사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으며, 특히 삼우정유, 삼우화재 등에서 경영기획 및 자금 운영 부문을 담당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신영철은 조직 내 안정적인 성과와 보수적인 경영 자세로 아버지의 신임을 얻으며 점차 후계자로서 입지를 굳혀갔다. 장남도 아니고 차남인 신영철이 회장직을 물려받은 것이 전통적인 재벌 구조에서는 조금 의아할 수 있는데, 이는 장남의 경영실패로 후계구도에서 쫓겨난 탓이 크다.
신덕균의 장남인 신영호는 1960년대 후반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차세대백화점에 입사하며 경영 일선에 참여하였다. 그는 당시 백화점 산업의 패러다임 전환기에 접어든 국내 유통 시장에서 진보적인 마케팅 전략과 해외 유통 모델 도입을 추진하며 유통계의 혁신을 이끌겠다는 비전을 제시하였다. 초기에는 일정 수준의 매출 성장세를 기록했으나 이후 경영 전략의 일관성 부재와 재무관리 미숙으로 인해 점차 수익성이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장남인 신영호는 그룹 재무부문 및 전략기획실과 마찰을 빚었으며, 내부 감사에서는 리베이트 수수와 임원 인사 전횡 의혹도 불거져 경영진 내 불신이 증폭되었다. 당시 아버지 신덕균은 이를 두고 "그룹 전체의 신뢰를 저해하는 경영 행위"로 판단하고, 장남 신영호를 유통 계열사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도록 조치하였다. 결과적으로 신영호는 그룹 내 후계 구도에서 사실상 배제되었으며 반대로 안정적인 성과와 조직 융화력을 보여준 차남 신영철이 후계자로 낙점되는 계기가 되었다.
회장으로의 활동
삼우그룹의 제3대 회장으로 공식 취임한 신영철은 아버지 신덕균의 중화학공업 기반을 계승하는 동시에, 산업 고도화와 글로벌화 흐름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재편에 착수하였다. 당시 정부는 중화학 산업 고도화와 R&D 중심 기업의 육성을 적극 장려하였고, 동남아·중국 등의 후발국 진출 가속화에 대비한 경쟁력 확보가 재계의 화두가 되었다. 신영철은 이러한 산업적 기조에 발맞추어 고부가가치 사업으로 포트폴리오를 확장할 필요성을 절감하며 대규모 투자를 진행한다.
1987년 일본의 전자부품 전문기업 TDK와의 합작을 통해 삼우TDK를 설립하였다. 이는 국내외 급성장하던 전자기기 시장과 IT 산업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양사는 합작법인을 통해 콘덴서, 자기헤드, 페라이트 코어 등 고기능 부품을 국내에서 생산하며 가격경쟁력과 기술 경쟁력을 동시에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삼우TDK는 설립 이후 국내 주요 전자회사들과 납품 계약을 체결하며 빠르게 시장에 안착하였고, 일부 제품은 아시아 시장 수출도 개시하였다.
1989년 삼우전기가 자체 개발한 국산 PLC 제품을 시장에 출시해 산업 자동화 분야의 핵심 솔루션을 내세웠으며, 일본·독일계 수입 제품에 의존하던 국내 자동화 설비 시장에 가성비와 유지보수 용이성을 무기로 본격 진입하였다. 이후 삼우전기는 산업 전력기기와 자동화 제어기술을 바탕으로 전 세계 B2B 시장을 빠르게 선점하기 시작했다. 특히 산업용 전력설비 부문에서 품질 안정성과 내구성, 압도적인 가성비로 경쟁력을 인정받으며 국내외 대기업들과의 납품 계약을 통해 안정적인 매출 기반을 확보하였다.
1990년 민영 방송사인 TVT를 창립하며 미디어 사업에도 진출하였다.
1992년 삼우정유는 중질유 분해시설을 완공하며, 낙후된 정유 설비에서 벗어나 경질유 중심의 고부가 정제 구조로 전환하였다. 같은 해 PX 공장 착공 및 가동에 돌입해 석유화학 원료를 내재화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를 통해 정유-화학의 수직계열화를 본격적으로 구축하였다. 이 같은 투자는 타 계열사와의 원재료 공급 안정성을 높이고 그룹 내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듬 해 국내 최초의 직영 주유소 브랜드인 '오일허브'를 론칭하면서 유통 부문에서의 마진 개선과 고객 접점도 강화하였다.
삼우화학은 기존의 범용 석유화학 사업에서 벗어나 고기능성 첨단소재 분야로의 전환을 모색하였다. 삼우화학의 생활용품부문을 삼우생활건강으로 물적분할 후 1993년 국내 최초로 산업용 탄소섬유 생산라인을 구축하면서 항공기 보강재·자동차 부품용 복합소재 시장 진출을 추진하였다. 동시에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산업의 성장에 대응하여 반도체 세정용 고순도 화학약품, 포토레지스트 계열의 감광재료, 에폭시 수지 등 소재 국산화에 나섰다. 1995년에는 국내 최초로 광학용 필름 생산 설비를 도입하여, LCD 백라이트 유닛 및 편광판용 필름을 개발·생산하게 되었고 이는 일본 제품의 수입 대체 효과를 불러왔다.
그러나 1997년 말, IMF 외환위기의 여파가 삼우그룹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신영철 회장은 삼우정유, 삼우화학, 삼우전기 등 중화학·중공업 기반의 핵심 제조 계열사에 자금과 역량을 집중하고, 비핵심 계열사는 합병 및 매각을 통해 단계적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고강도 구조조정과 내실 경영을 통해 위기 속에서도 주력 산업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도 핵심 제조 분야 중심으로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가게 된다.
신영철은 평소 "만 70세가 되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주변에 밝혀왔으며, 실제로 2013년 만 70세가 되자 장남 신동호에게 총수직을 공식적으로 승계하고 스스로 명예회장직으로 물러났다. 그는 이후에도 삼우그룹의 경영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투자와 관련한 자문 역할은 비공식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계획적인 승계 과정은 국내 주요 재벌들과 차별화된 사례로 평가되었으며, 재계와 언론에서는 '안정적이고 모범적인 세대 교체'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