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펼치기 · 접기 ]
초대
신익상
(1916 ~ 1958)
제2대
신덕균
(1958 ~ 1985)
제3대
신영철
(1985 ~ 2013)
제4대
신동호
(2013 ~)
삼우그룹 제2대 회장
신덕균
申德均 | Shin deok-gyun
출생 1914년 7월 11일
경성부 인사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사망 1987년 10월 3일 (향년 73세)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국적 대한민국_국기.svg 대한민국
본관 평산 신씨 (平州 申氏)
운암 (雲巖)
부모 아버지 신익상, 어머니 임춘옥
형제자매 형 신낙균
여동생 신영희
남동생 신종균
배우자 이순자
자녀 장남 신영길
차남 신영철
장녀 신정혜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삼우그룹 제2대 회장을 역임했다.

생애

젊은 시절[1]


1914년 9월 17일 서울 인사동에서 아버지 신익상과 어머니 윤춘심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4년 경성부 중앙고등보통학교[2]를 졸업한 뒤, 일본 도쿄의 주오대학(中央大学) 예과에 진학하여 상업과 경제 관련 과목을 수학하였다.[3] 학업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으나 본과 진학을 앞두고 부친의 사업 확장을 도와주기 위해 조기에 귀국한다.

1936년 경성백화점의 점원으로 입사하며 진열, 회계, 납품 관리 등에 참여하였고, 1938년 삼우화학공업에서 창고와 재고관리, 유통망 구축 실무를 도맡았다. 이후 삼우화학공업에서 출시한 화장수 '수안비'의 유통 전략을 주도하며 입지를 다지고, 해방 이후 신익상과 협력했던 일본인 와타나베와 김명식이 회사를 떠난 후에는 사실상 신익상의 2인자 역할을 맡아 그룹 내 주요 사업부문을 총괄하였다. 또한 1947년 출시된 '백조비누'의 전국 유통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며 삼우의 유통 기반을 재편하는 데 기여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발발로 삼우화학공업 서울 공장이 파괴되자, 아버지 신익상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해 삼우상사를 설립하고 무역 사업에 뛰어들었다. 전후 전국에 흩어진 고철을 수집해 일본에 수출하고 벌어들인 외화를 기반으로 사업 인프라를 복구하는 데 앞장섰다. 1958년 아버지 신익상의 사망 이후 삼우그룹의 제2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회장으로의 활동

회장 취임 이후 신덕균은 삼우그룹의 주요 사업을 정비하며 그룹 전체의 자금 흐름과 외환 조달, 기업 간 거래에서 금융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특히 1960년대 들어 정부가 추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민간 기업에도 자금 동원력과 금융 기반을 요구했고, 수출입 확대 및 건설 자재 확보 과정에서도 안정적인 자금 조달 창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신덕균은 그룹 내 자체 금융 기반 없이 외부 은행에만 의존할 경우 위기 대응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인식하고 금융 계열사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1962년 신덕균은 삼우생명을 설립한다. 초기에는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단체보험 상품을 중심으로 영업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개인보험과 교육보험, 저축성 보험 등으로 상품을 다변화하였다. 삼우생명은 보험료 적립금을 기반으로 그룹의 안정적인 자금 조달 창구 역할을 수행하며 삼우그룹 금융 계열 확장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후 삼우증권삼우화재를 연이어 설립하면서 자체적인 금융 생태계를 통해 대규모 투자와 사업 확장에 필요한 자금을 보다 원활하게 조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했다.

금융 계열사 설립을 통해 안정적인 자금 운용 구조를 갖추게 된 삼우그룹은 축적된 자본력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기간산업 진출을 모색하게 된다. 특히 당시 정부가 추진한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은 민간 대기업의 대규모 설비 투자와 기술력 확보를 요구하였으며, 이를 통해 국가 전체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신덕균은 이를 삼우그룹의 성장 도약의 기회로 인식하고, 금융 부문에서 축적된 내부 자금력과 외자 유치 능력을 기반으로 중공업 분야로의 진출을 결정하게 된다.

1967년에는 정부 주도의 제2정유공장 설립 계획에 발맞추어 영국의 로얄 더치 쉘과의 합작을 통해 삼우정유를 설립하였으며, 이는 삼우그룹의 중화학 산업 진입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어 1972년에는 부실기업인 대한중기를 인수하며 기계공업 분야에 진출하였고, 일본의 미쓰비시 전기와의 기술 제휴를 통해 본격적인 중공업 사업을 전개하였다.

1970년대 후반 삼우그룹은 중공업 부문에서의 기반을 다지며 이후 차세대 전략산업으로 급부상하던 전자 및 반도체 분야에 주목하게 된다. 당시 정부는 수출 주도형 산업 정책의 일환으로 전자산업을 중점 육성 산업으로 지정하고 외자 도입과 기술 이전을 장려하고 있었다. 신덕균은 세계 시장에서의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룹의 장기 생존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 기술 집약적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진입을 추진하게 된다.

1978년 삼우그룹은 삼우전자공업를 설립하며 전자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초창기에는 라디오, 계산기 등 간단한 전자기기를 생산하며 소비자 시장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이미 소비자 시장은 미국, 일본 기업들이 공고하게 장악하고 있었고 삼우전자공업의 기술력과 유통망은 이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삼우전자공업은 매년 1,000억 이상의 적자를 기록하며 사업 구조에 한계를 드러나게 된다.

야심차게 설립한 삼우전자공업은 2년 만에 기존의 소비자 가전 생산에서 철수하고, 미국서 반도체 검사 장비를 수입하는 기술전문 상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신덕균은 반도체 산업의 급속한 성장과 함께 관련 장비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아예 사업군을 반도체 공정 장비를 주력으로 삼고, 자체적인 반도체 테스트 장비 및 공정 장비의 국산화를 목표로 연구개발 부서를 신설하면서 반도체 장비 중심의 B2B 특화 제품군을 내세우기 시작한다.

1985년부터 신덕균은 심장 질환과 고혈압 등 지병으로 인해 점차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고, 주요 계열사의 전략 수립은 차남인 신영철에게 이관하였다. 이후 투병 생활을 이어오던 그는 1987년 10월 3일 서울 자택에서 지병 악화로 타계하였다. 향년 73세였다.


  1. 제법 미남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본인의 젊은시절 얼굴이 인터넷에 화제가 된 적이 있으며 본인도 외모를 자랑스러워했다.
  2. 현 중앙고등학교
  3. 수료는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