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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우그룹 창업주 신익상 申翼相 | Shin Iksa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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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880년 7월 25일 |
| 경기도 개성유수부 (現 개성시) | |
| 사망 | 1958년 12월 11일 (향년 78세)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 |
| 국적 | |
| 본관 | 평산 신씨 (平州 申氏) |
| 호 | 청연 (靑燕) |
| 부모 | 아버지 신두익, 어머니 윤춘심 |
| 형제자매 | 2남 2녀 중 차남 |
| 배우자 | 임춘옥 |
| 자녀 | 장남 신낙균 차남 신덕균 장녀 신영희 삼남 신종균 |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삼우그룹의 창업주이다.
생애
1887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가난에 지친 어머니는 그를 안고 친정인 서울 인사동으로 올라와서 함께 살았다. 친정 또한 살림이 넉넉지 못해 그의 어머니는 밤새워 남의 집 삯바느질을 해 주며 근근이 살아갔다.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보성중학교[1]까지 보내기는 했으나 공부에만 전념케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이후 그는 보성중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광산학교에서 광산학을 제대로 배워 노다지 꿈을 이루고 그 자금으로 일대 사업을 펼쳐보리라 결심한다.
광산학교 초급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그는 평안도의 한 광산에서 근무하였으나 일이 맞지 않았던 그는 돈 40원을 모으고 퇴직한다. 20대 중반 한창 나이에 실업자가 된 그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는데,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모두 중퇴여서 변변한 졸업장 하나 없었고 그렇다고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며칠 내내 집에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누이동생과 함께 서울 변두리에서 헌 구두와 양복을 사서 수선한 뒤 그것들을 갖고 시내를 돌았다. 헌 구두는 구두 수선공에게, 헌 내의는 시장 상인들에게 팔았더니 6개월 만에 200여원을 모으는 등 제법 이윤이 남았다.
이듬해 그는 외갓집 주선으로 상업은행 동대문지점에 은행원으로 취직을 한다.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고 밤에는 양복을 사다가 고쳐서 되파는 장사를 계속했는데, 오히려 은행원 일보다 밤마다 벌이는 옷 장사가 오히려 훨씬 수입이 좋았다. 양복 장사가 차츰 자리를 잡자, 그는 누이동생에게 헌 재봉틀 한 대를 사주어 본격적으로 밤새워 양복을 수선케 하고 헌책들도 사들여 떨어진 책장을 새로 붙이고 고서방에 넘겨보니 그 또한 이익이 쏠쏠했다.
1917년 그는 서울 종로 초입에 삼우그룹의 모태가 되는 '덕성상회'를 열고 잡화상을 시작했다. 낮에는 최남이 은행에 출근해 누이동생이 가게에서 손님을 맞았다. 퇴근한 뒤에는 작업복을 입고 가게에 나가 손님을 받거나 고물을 떼어왔다. 덕성상회가 날로 번창해지자 그는 은행 일을 그만두고 오직 가게를 넓히고 좋은 상품을 들여다 단골손님 늘리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국산품 애용 운동이 크게 일어나면서 그 여파로 명동의 일본인 상회들을 물리치고 전통적 조선상가이던 종로 쪽에 인파가 몰려들게 된다. 그 여운을 몰아 덕성상회는 자본금을 두 배로 늘릴 수 있었다.
- ↑ 현 고려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