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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와타나베를 일본 오사카에 수시로 출장을 보내 상품을 공장에서 직접 사들일 수 있는 상품 구입로를 개척하고, 1931년 종로에 4층 건물을 신축하여 '''경성백화점'''을 세운다. 그는 경성백화점을 미쓰코시 못지않은 현대식 백화점으로 만들기 위하여 점포 내의 진열과 장식에 특히 중점을 두어 개선하였다. 또한 200여 종업원을 모두 일본인 백화점의 종업원에 뒤지지 않게 훈련시켰고, 손님을 대할 때도 친절하게 하도록 교육하였다. 종업원 중 절반을 여성으로 채용한 다음 손님에게 친절과 봉사를 다 하도록 힘썼다. 이러한 친절과 서비스 정신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1932년 그는 서울 최대의 금은상이었던 '금강상회'를 인수한다. 이 무렵 만 2년 동안 유지되던 금본위제가 폐지되면서 금 시세가 폭등하게되자 엄청난 이익을 보았으며 곧 종로의 조선인 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 이후 와타나베를 일본 오사카에 수시로 출장을 보내 상품을 공장에서 직접 사들일 수 있는 상품 구입로를 개척하고, 1931년 종로에 4층 건물을 신축하여 '''경성백화점'''을 세운다. 그는 경성백화점을 미쓰코시 못지않은 현대식 백화점으로 만들기 위하여 점포 내의 진열과 장식에 특히 중점을 두어 개선하였다. 또한 200여 종업원을 모두 일본인 백화점의 종업원에 뒤지지 않게 훈련시켰고, 손님을 대할 때도 친절하게 하도록 교육하였다. 종업원 중 절반을 여성으로 채용한 다음 손님에게 친절과 봉사를 다 하도록 힘썼다. 이러한 친절과 서비스 정신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1932년 그는 서울 최대의 금은상이었던 '금강상회'를 인수한다. 이 무렵 만 2년 동안 유지되던 금본위제가 폐지되면서 금 시세가 폭등하게되자 엄청난 이익을 보았으며 곧 종로의 조선인 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 ||
=== [[삼우화학| | === [[삼우화학|삼우화학공업]] 설립 === | ||
백화점에서 판매하던 서양제 화장품과 일본제 화장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신익상은 이에 자극을 받아 화장품 생산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때 | 백화점에서 판매하던 서양제 화장품과 일본제 화장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신익상은 이에 자극을 받아 화장품 생산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때 와타나베에게 대한제국 시기 유년기에 미국 유학을 떠나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약학을 전공한 기술자 '''김명식'''을 소개받게 되고, 신익상은 김명식에게 동업을 제안한다. 뜻이 맞았던 이들은 1926년에 [[삼우화학|삼우화학공업]]을 함께 설립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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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4일 (금) 10:5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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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우그룹 창업주 신익상 申翼相 | Shin Ik-sa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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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880년 7월 25일 |
| 경기도 개성유수부 (現 개성시) | |
| 사망 | 1958년 12월 11일 (향년 78세)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 |
| 국적 | |
| 본관 | 평산 신씨 (平州 申氏) |
| 호 | 청연 (靑燕) |
| 부모 | 아버지 신두익, 어머니 윤춘심 |
| 형제자매 | 2남 2녀 중 차남 |
| 배우자 | 임춘옥 |
| 자녀 | 장남 신낙균 차남 신덕균 장녀 신영희 삼남 신종균 |
개요
"사람의 마음을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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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이념 |
대한민국의 기업인. 삼우그룹의 창업주이다.
생애
유년~청년기
1890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가난에 지친 어머니는 그를 안고 친정인 서울 인사동으로 올라와서 함께 살았다. 친정 또한 살림이 넉넉지 못해 그의 어머니는 밤새워 남의 집 삯바느질을 해 주며 근근이 살아갔다.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보성학교[1]까지 보내기는 했으나 공부에만 전념케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보성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광산학교에서 광산학을 제대로 배워 노다지 꿈을 이루고, 그 자금으로 일대 사업을 펼쳐보리라 결심한다.
광산학교 초급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그는 평안도의 한 광산에서 근무하였으나, 광산 일이 맞지 않았던 그는 돈 40원을 모으고 퇴직한다.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모두 중퇴여서 변변한 졸업장 하나 없었고, 그렇다고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그는 며칠 내내 집에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아내 임춘옥과 함께 헌 구두와 양복을 사서 수선한 뒤 헌 구두는 구두 수선공에게, 헌 내의는 시장 상인들에게 파는 장사를 시작한다. 장사가 잘 되면서 어느새 능숙한 장사꾼이 되어간 그는 6개월 만에 200여원을 모으게 된다.
이후 1913년 그는 외갓집 주선으로 상업은행의 은행원으로 취직을 하게 된다.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고 밤에는 양복을 사다가 고쳐서 되파는 장사를 계속했는데, 오히려 은행원 일보다 밤마다 벌이는 옷 장사가 훨씬 수입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양복 장사가 차츰 자리를 잡자, 그는 아내에게 헌 재봉틀 한 대를 사주어 본격적으로 밤새워 양복을 수선케 하고 헌책들도 사들여 떨어진 책장을 새로 붙이고 고서방에 넘겨보니 그 또한 이익이 쏠쏠했다.
덕성상회 창업과 성장
1916년 그는 서울 종로 초입에 삼우그룹의 모태가 되는 '덕성상회'이라는 잡화상을 열고 투잡생활을 시작한다. 낮에는 아내가 가게에서 손님을 맞았고 그가 퇴근한 뒤에는 직접 가게에 나가 손님을 받거나 고물을 떼어왔다. 덕성상회는 철저한 제값주의를 고수해왔는데, 당시 물건 값은 주인이 매기기 나름이어서 손님과 가게 주인 사이의 실랑이는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수백 년 동안 내려오던 악습을 과감하게 내던지면서 손님들 사이에 성원상회는 정직한 가게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가 가게는 날로 번성했다. 이후 그는 은행 일을 그만두고 오직 덕성상회를 넓히고 좋은 상품을 들여다 단골손님 늘리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국산품 애용 운동이 일어나면서 조선인 상인 위주의 종로 쪽에 인파가 몰려들자 그 여파로 덕성상회는 자본금을 두 배로 늘릴 수 있었다. 그는 장사에 뛰어든 지 불과 8년 만에 자본금 20여만원, 종로 큰길가에 점포 5개, 점원도 50여명이나 둔 거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1920년대 일본 자본의 백화점이 서울 곳곳에 들어서면서 사세가 크게 위축되고, 이때 그는 일본 자본가들에 맞서 직접 백화점을 운영해 보고 싶은 야망이 생긴다.
그는 미쓰코시[2]에 거의 날마다 드나들며 상품들과 진열 상황을 조사했다. 이때 미쓰코시의 점원 와타나베 요시미와 가까운 사이가 된다. 와타나베는 미쓰코시에서 7년이나 근무한 유능한 점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신용도와 안정성은 일본인 고객들 사이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와타나베가 퇴근할 때를 기다렸다가 함께 식사도 하고, 때로는 덕성상회에도 데리고 와 장사 일을 상담하고 조언을 받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와타나베를 집으로 초대해 점심을 함께하며 종로에 백화점을 내고 싶다고 털어놓으면서 동업을 제안한다. 와타나베는 그의 뜻에 따라 덕성상회 지배인 자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후 와타나베를 일본 오사카에 수시로 출장을 보내 상품을 공장에서 직접 사들일 수 있는 상품 구입로를 개척하고, 1931년 종로에 4층 건물을 신축하여 경성백화점을 세운다. 그는 경성백화점을 미쓰코시 못지않은 현대식 백화점으로 만들기 위하여 점포 내의 진열과 장식에 특히 중점을 두어 개선하였다. 또한 200여 종업원을 모두 일본인 백화점의 종업원에 뒤지지 않게 훈련시켰고, 손님을 대할 때도 친절하게 하도록 교육하였다. 종업원 중 절반을 여성으로 채용한 다음 손님에게 친절과 봉사를 다 하도록 힘썼다. 이러한 친절과 서비스 정신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1932년 그는 서울 최대의 금은상이었던 '금강상회'를 인수한다. 이 무렵 만 2년 동안 유지되던 금본위제가 폐지되면서 금 시세가 폭등하게되자 엄청난 이익을 보았으며 곧 종로의 조선인 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삼우화학공업 설립
백화점에서 판매하던 서양제 화장품과 일본제 화장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신익상은 이에 자극을 받아 화장품 생산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때 와타나베에게 대한제국 시기 유년기에 미국 유학을 떠나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약학을 전공한 기술자 김명식을 소개받게 되고, 신익상은 김명식에게 동업을 제안한다. 뜻이 맞았던 이들은 1926년에 삼우화학공업을 함께 설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