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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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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0년 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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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개성유수부 <br>(現 개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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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12월 11일 (향년 78세)
| 1958년 12월 21일 (향년 6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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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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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남 신낙균<br>차남 [[신덕균]]<br>장녀 신영희<br>삼남 신종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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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 어록 ===
{{인용문|'''"사람의 마음을 사라"<ref>일상의 삶을 통해서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읽고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대단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뜻이다.</ref>'''|경영철학}}
{{인용문|'''"사람의 마음을 사라"'''<br>'''똥을 싸라 그러면 유명해질 것이다"|경영철학}}
 


대한민국의 기업인. [[삼우그룹]]의 창업주이다.
대한민국의 기업인. [[삼우그룹]]의 창업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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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
=== 유년~청년기 ===
=== 유년~청년기 ===
1891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가난에 지친 어머니는 그를 안고 친정인 서울 인사동으로 올라와서 함께 살았다. 친정 또한 살림이 넉넉지 못해 그의 어머니는 밤새워 남의 집 삯바느질을 해 주며 근근이 살아갔다.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보성중학교<ref>현 고려대학교</ref>까지 보내기는 했으나 공부에만 전념케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이후 그는 보성중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광산학교에서 광산학을 제대로 배워 노다지 꿈을 이루고 그 자금으로 일대 사업을 펼쳐보리라 결심한다.
1890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가난에 지친 어머니는 그를 안고 친정인 서울 인사동으로 올라와서 함께 살았다. 친정 또한 살림이 넉넉지 못해 그의 어머니는 밤새워 남의 집 삯바느질을 해 주며 근근이 살아갔다.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보성학교<ref>현 고려대학교</ref>까지 보내기는 했으나 공부에만 전념케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보성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광산학교에서 광산학을 제대로 배워 노다지 꿈을 이루고, 그 자금으로 일대 사업을 펼쳐보리라 결심한다.
 
광산학교 초급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그는 평안도의 한 광산에서 근무하였으나 광산 일이 맞지 않았던 그는 돈 40원을 모으고 퇴직한다. 실업자가 된 그는 막막하기만 했는데,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모두 중퇴여서 변변한 졸업장 하나 없었고 그렇다고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며칠 내내 집에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누이동생과 함께 헌 구두와 양복을 사서 수선한 뒤 헌 구두는 구두 수선공에게, 헌 내의는 시장 상인들에게 파는 장사를 시작한다.


1912년 그는 외갓집 주선으로 상업은행의 은행원으로 취직을 하게 된다.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고 밤에는 양복을 사다가 고쳐서 되파는 장사를 계속했는데, 6개월 만에 200여원을 모으면서 오히려 은행원 일보다 밤마다 벌이는 옷 장사가 훨씬 수입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양복 장사가 차츰 자리를 잡자, 그는 누이동생에게 헌 재봉틀 한 대를 사주어 본격적으로 밤새워 양복을 수선케 하고 헌책들도 사들여 떨어진 책장을 새로 붙이고 고서방에 넘겨보니 그 또한 이익이 쏠쏠했다.
광산학교 초급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그는 평안도의 한 광산에서 근무하였으나, 광산 일이 맞지 않았던 그는 돈 40원을 모으고 퇴직한다.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모두 중퇴여서 변변한 졸업장 하나 없었고, 그렇다고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그는 며칠 내내 집에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아내 임춘옥과 함께 헌 구두와 양복을 사서 수선한 뒤 헌 구두는 구두 수선공에게, 헌 내의는 시장 상인들에게 파는 장사를 시작한다. 장사가 잘 되면서 어느새 능숙한 장사꾼이 되어간 그는 6개월 만에 200여원을 모으게 된다.


=== 덕성상회 창업과 성장 ===
이후 1913년 그는 외갓집 주선으로 상업은행의 은행원으로 취직을 하게 된다.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고 밤에는 양복을 사다가 고쳐서 되파는 장사를 계속했는데, 오히려 은행원 일보다 밤마다 벌이는 옷 장사가 훨씬 수입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양복 장사가 차츰 자리를 잡자, 그는 아내에게 헌 재봉틀 한 대를 사주어 본격적으로 밤새워 양복을 수선케 하고 헌책들도 사들여 떨어진 책장을 새로 붙이고 고서방에 넘겨보니 그 또한 이익이 쏠쏠했다.


1917년 그는 서울 종로 초입에 [[삼우그룹]]의 모태가 되는 ''''덕성상회''''이라는 잡화상을 열고 투잡생활을 시작한다. 낮에는 누이동생이 가게에서 손님을 맞았고 그가 퇴근한 뒤에는 직접 가게에 나가 손님을 받거나 고물을 떼어왔다. 덕성상회는 철저한 제값주의를 고수해왔는데, 그즈음 물건 값은 주인이 매기기 나름이어서, 손님과 가게 주인 사이의 실랑이는 피할 수 없었다. 수백 년 동안 내려오던 악습을 과감하게 내던지면서 손님들 사이에 성원상회는 정직한 가게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가 가게는 날로 번성했다. 이후 그는 은행 일을 그만두고 오직 덕성상회를 넓히고 좋은 상품을 들여다 단골손님 늘리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1916년 그는 서울 종로 초입에 [[삼우그룹]]의 모태가 되는 ''''덕성상회''''이라는 잡화상을 열고 투잡생활을 시작한다. 낮에는 아내가 가게에서 손님을 맞았고 그가 퇴근한 뒤에는 직접 가게에 나가 손님을 받거나 고물을 떼어왔다. 덕성상회는 철저한 제값주의를 고수해왔는데, 당시 물건 값은 주인이 매기기 나름이어서 손님과 가게 주인 사이의 실랑이는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수백 년 동안 내려오던 악습을 과감하게 내던지면서 손님들 사이에 성원상회는 정직한 가게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가 가게는 날로 번성했다. 이후 그는 은행 일을 그만두고 오직 덕성상회를 넓히고 좋은 상품을 들여다 단골손님 늘리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국산품 애용 운동이 일어나면서 명동의 일본인 상인들을 물리치고 조선인 상인 위주의 종로 쪽에 인파가 몰려들게 되는데, 그 여파로 덕성상회는 자본금을 두 배로 늘릴 수 있었다. 그는 장사에 뛰어든 지 불과 8년 만에 자본금 20여만원, 종로 큰길가에 점포 5개, 점원도 50여명이나 둔 거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1920년대 일본 자본의 백화점이 서울 곳곳에 들어서면서 사세가 크게 위축되고, 이때 그는 일본 자본가들에 맞서 직접 백화점을 운영해 보고 싶은 야망이 생긴다.
=== 사업 초기와 성장 ===


=== [[차세대백화점]] 설립 ===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의 여파로 국산품 애용 운동이 일어나면서 조선인 상인 위주의 종로 쪽에 인파가 몰려들자 그 여파로 덕성상회는 자본금을 두 배로 늘릴 수 있었다. 그는 장사에 뛰어든 지 불과 8년 만에 자본금 20여만원, 종로 큰길가에 점포 5개, 점원도 50여명이나 둔 거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일본 자본의 백화점이 서울 곳곳에 들어서면서 사세가 크게 위축되고, 이때 그는 일본 자본가들에 맞서 직접 백화점을 운영해 보고 싶은 야망이 생긴다.


그는 미쓰코시<ref>현 신세계백화점 본점</ref>에 거의 날마다 드나들며 상품들과 진열 상황을 조사했다. 당시 미쓰코시의 점원 와타나베 요시미와 가까운 사이가 된다. 와타나베는 미쓰코시에서 7년이나 근무한 유능한 점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신용도와 안정성은 일본인 고객들 사이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와타나베가 퇴근할 때를 기다렸다가 함께 식사도 하고, 때로는 덕성상회에도 데리고 와 장사 일을 상담하고 조언을 받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와타나베를 집으로 초대해 점심을 함께하며 종로에 백화점을 내고 싶다고 털어놓으면서 동업을 제안한다.  
그는 미쓰코시<ref>현 신세계백화점 본점</ref>에 거의 날마다 드나들며 상품들과 진열 상황을 조사했다. 이때 미쓰코시의 점원 '''와타나베 히로시'''와 가까운 사이가 된다. 와타나베는 미쓰코시에서 7년이나 근무한 유능한 점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신용도와 안정성은 일본인 고객들 사이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와타나베가 퇴근할 때를 기다렸다가 함께 식사도 하고, 때로는 덕성상회에도 데리고 와 장사 일을 상담하고 조언을 받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와타나베를 집으로 초대해 점심을 함께하며 종로에 백화점을 내고 싶다고 털어놓으면서 동업을 제안한다. 와타나베는 그의 뜻에 따라 덕성상회 지배인 자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와타나베는 그의 뜻에 따라 덕성상회 지배인 자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후 그는 와타나베를 일본에 수시로 출장 보내 상품을 공장에서 직접 사들일 수 있는 상품 구입로를 개척하게 했다.  
이후 와타나베를 일본 오사카에 수시로 출장을 보내 상품을 공장에서 직접 사들일 수 있는 상품 구입로를 개척하고, 1932년에 종로에 4층 건물을 신축하여 '''경성백화점'''을 세운다. 그는 경성백화점을 미쓰코시 못지않은 현대식 백화점으로 만들기 위하여 점포 내의 진열과 장식에 특히 중점을 두어 개선하였다. 또한 200여 종업원을 모두 일본인 백화점의 종업원에 뒤지지 않게 훈련시켰고, 손님을 대할 때도 친절하게 하도록 교육하였다. 이러한 친절과 서비스 정신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백화점 신축과 함께 사업 확장을 위해 서울 최대 금은상이었던 '금강상회'를 인수하는데, 이 무렵 금본위제가 폐지되면서 금 시세가 폭등하게되자 엄청난 이익을 보았으며 곧 종로의 조선인 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 어록 ===
=== [[삼우화학|삼우화학공업]] 설립 ===
{{인용문|'''"사람의 마음을 사라"'''}}
신익상은 남들보다 훨씬 앞서 상업계에 진출한 인물이었지만,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자 대담한 상행위로 새로운 경영 방법을 구사하는 경쟁사들이 등장하면서 백화점만으로 사업은 힘들 것이라 판단한다. 새로운 사업을 발굴하던 중 당시 일본에서 수입해 온 화장품들이 큰 호응을 받았던 것을 떠오르며 직접 화장품 생산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때 와타나베에게 미국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약학을 전공한 기술자 '''김명식'''을 소개받게 되고, 신익상은 김명식에게 동업을 제안한다. 뜻이 맞았던 이들은 1934년 [[삼우화학|삼우화학공업]]을 함께 설립한다. 여기서 삼우(三友)는 이름은 '''신익상·김명식·와타나베''' 세 명을 뜻한다.


1935년 김명식이 배워 온 서양 의약 지식을 바탕으로 과학적인 제조법을 동원해 개발한 화장수 ''''수안비''''<ref>현재까지도 [[삼우생활건강]]을 통해 생산하고 있다.</ref>를 출시한다. 수안비는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품질이 좋다는 입소문을 타고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곧 중산층 소비자들에게까지 퍼져나가며 베스트셀러 제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곧 당시 조선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던 일본계 화장품 회사들과의 직접적인 경쟁 구도를 형성하게 되었고, 점차 일제 당국의 눈밖에 나게 되면서 [[삼우화학|삼우화학공업]]에 행정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익상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수안비의 성공을 발판 삼아 치약, 크림, 파우더 등 생활용품과 기초화장품으로 생산 품목을 넓혀가며 조선 내 토종 화장품 브랜드로서 입지를 다져갔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조선 내 일본인들은 본국 송환 조치의 대상이 되었다. 신익상과 함께 [[차세대백화점|경성백화점]]과 [[삼우화학|삼우화학공업]]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와타나베는 일제 말기 고조된 반일 감정과 미군정의 강제 송환 정책 앞에서 조용히 서울을 떠나고, 김명식은 [[삼우화학|삼우화학공업]]에서 물러나 자신의 회사를 세우며 독자적인 길을 걷는다. 내부의 조력자가 없는 상황에서 홀로 남겨진 기업을 지켜내야 했던 것이었다.


신익상은 이 틈을 기회로 삼으며 '''"화장품에서 생활용품으로"'''이라는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된다. 해방 직후 경제적 공백으로 생활 필수품의 극심한 부족에 시달리면서 일제 치하에서 들어오던 물자 공급은 끊겼고, 민간 제조 기반은 극도로 취약해 비누, 치약, 세제와 같은 기본 위생용품조차 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생활용품은 미군이 PX를 통해 들여온 수입품이거나 장날에 떠도는 고가의 외제품에 의존하던 실정이었다. 1947년 신익상은 해외에서 비누 생산 설비를 들여오고 화장품 제조에 쓰던 향료와 화학 원료 기술을 응용하여, ''''백조비누''''를 출시한다. 가격도 수입품에 비해 훨씬 저렴했던 백조비누는 서울과 평양, 대구, 부산 등지의 시장에 납품되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  [[삼우(기업)|삼우상사]] 설립과 사망 ===
1950년 6·25 전쟁 발발과 동시에 [[삼우화학|삼우화학공업]] 공장은 폭격과 철수 과정에서 파괴되었고, 신익상은 가족과 주요 직원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한다. 사업이 전면 중단된 상황에서 그는 부산에서 마지막 남은 자금 일부를 모아 1952년 '''[[삼우(기업)|삼우상사]]'''라는 이름의 무역 회사를 설립한다. 이후 전쟁으로 전국에 흩어진 고철과 탄피, 철제 잔해물들을 수집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철강 자원이 부족했던 일본에 수출하는 사업을 시작한다. 사업을 시작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10억 원이 넘는 이익을 기록했고, 1년 뒤에는 무려 40억 원에 달하는 자산을 축적하며 단숨에 전쟁 이전보다 더 많은 자산을 축적하게 된다.


휴전 이후 신익상은 곧바로 서울로 복귀해 무너진 [[삼우화학|삼우화학공업]]과 [[차세대백화점|경성백화점]] 등 전쟁으로 붕괴된 기존 사업 인프라를 재건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직접 복구 공사를 진행하면서 건축 자재와 기술, 인력 수급 전반에 대한 노하우를 얻게 되었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을 보며 급격히 늘어날 수요를 감지한 그는 본격적으로 건설업 진출을 결심한다. 1953년 [[삼우(기업)|삼우상사]] 내에 ''''삼우 토건사업부''''를 신설하고, 기존 자사 시설 복구와 병행해 민간 주택과 창고, 공장 등 중소 규모 건축 수주를 시작한다.


1956년 신익상은 전후 복구를 마친 경성백화점의 이름을 '''[[차세대백화점]]'''으로 변경하며 유통 사업을 새롭게 이어갔다. 같은 해 [[삼우화학|삼우화학공업]] 공장도 재건을 마치며 다시 가동에 들어갔고 [[삼우]]는 건설, 화학, 유통을 아우르는 중견그룹으로 빠르게 성장한다. 그러나 1958년 오랜 시간 앓아온 폐결핵의 합병증으로 쓰러졌고, 1958년 12월 21일 서울 자택에서 향년 68세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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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삼우]]
[[분류:삼우]]

2025년 7월 5일 (토) 11:21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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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신익상
(1916 ~ 1958)
제2대
신덕균
(1958 ~ 1985)
제3대
신영철
(1985 ~ 2013)
제4대
신동호
(2013 ~)
삼우그룹 창업주
신익상
申翼相 | Shin Ik-sang
출생 1890년 7월 25일
경기도 개성유수부
(現 개성시)
사망 1958년 12월 21일 (향년 68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국적 대한민국_국기.svg 대한민국
본관 평산 신씨 (平州 申氏)
청연 (靑燕)
부모 아버지 신두익, 어머니 윤춘심
형제자매 2남 2녀 중 차남
배우자 임춘옥
자녀 장남 신덕균
차남 신낙균
장녀 신영희
삼남 신종균

개요

"사람의 마음을 사라"[1]

경영철학

대한민국의 기업인. 삼우그룹의 창업주이다.

생애

유년~청년기

1890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가난에 지친 어머니는 그를 안고 친정인 서울 인사동으로 올라와서 함께 살았다. 친정 또한 살림이 넉넉지 못해 그의 어머니는 밤새워 남의 집 삯바느질을 해 주며 근근이 살아갔다.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보성학교[2]까지 보내기는 했으나 공부에만 전념케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보성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광산학교에서 광산학을 제대로 배워 노다지 꿈을 이루고, 그 자금으로 일대 사업을 펼쳐보리라 결심한다.

광산학교 초급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그는 평안도의 한 광산에서 근무하였으나, 광산 일이 맞지 않았던 그는 돈 40원을 모으고 퇴직한다.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모두 중퇴여서 변변한 졸업장 하나 없었고, 그렇다고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그는 며칠 내내 집에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아내 임춘옥과 함께 헌 구두와 양복을 사서 수선한 뒤 헌 구두는 구두 수선공에게, 헌 내의는 시장 상인들에게 파는 장사를 시작한다. 장사가 잘 되면서 어느새 능숙한 장사꾼이 되어간 그는 6개월 만에 200여원을 모으게 된다.

이후 1913년 그는 외갓집 주선으로 상업은행의 은행원으로 취직을 하게 된다.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고 밤에는 양복을 사다가 고쳐서 되파는 장사를 계속했는데, 오히려 은행원 일보다 밤마다 벌이는 옷 장사가 훨씬 수입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양복 장사가 차츰 자리를 잡자, 그는 아내에게 헌 재봉틀 한 대를 사주어 본격적으로 밤새워 양복을 수선케 하고 헌책들도 사들여 떨어진 책장을 새로 붙이고 고서방에 넘겨보니 그 또한 이익이 쏠쏠했다.

1916년 그는 서울 종로 초입에 삼우그룹의 모태가 되는 '덕성상회'이라는 잡화상을 열고 투잡생활을 시작한다. 낮에는 아내가 가게에서 손님을 맞았고 그가 퇴근한 뒤에는 직접 가게에 나가 손님을 받거나 고물을 떼어왔다. 덕성상회는 철저한 제값주의를 고수해왔는데, 당시 물건 값은 주인이 매기기 나름이어서 손님과 가게 주인 사이의 실랑이는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수백 년 동안 내려오던 악습을 과감하게 내던지면서 손님들 사이에 성원상회는 정직한 가게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가 가게는 날로 번성했다. 이후 그는 은행 일을 그만두고 오직 덕성상회를 넓히고 좋은 상품을 들여다 단골손님 늘리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사업 초기와 성장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의 여파로 국산품 애용 운동이 일어나면서 조선인 상인 위주의 종로 쪽에 인파가 몰려들자 그 여파로 덕성상회는 자본금을 두 배로 늘릴 수 있었다. 그는 장사에 뛰어든 지 불과 8년 만에 자본금 20여만원, 종로 큰길가에 점포 5개, 점원도 50여명이나 둔 거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일본 자본의 백화점이 서울 곳곳에 들어서면서 사세가 크게 위축되고, 이때 그는 일본 자본가들에 맞서 직접 백화점을 운영해 보고 싶은 야망이 생긴다.

그는 미쓰코시[3]에 거의 날마다 드나들며 상품들과 진열 상황을 조사했다. 이때 미쓰코시의 점원 와타나베 히로시와 가까운 사이가 된다. 와타나베는 미쓰코시에서 7년이나 근무한 유능한 점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신용도와 안정성은 일본인 고객들 사이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와타나베가 퇴근할 때를 기다렸다가 함께 식사도 하고, 때로는 덕성상회에도 데리고 와 장사 일을 상담하고 조언을 받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와타나베를 집으로 초대해 점심을 함께하며 종로에 백화점을 내고 싶다고 털어놓으면서 동업을 제안한다. 와타나베는 그의 뜻에 따라 덕성상회 지배인 자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후 와타나베를 일본 오사카에 수시로 출장을 보내 상품을 공장에서 직접 사들일 수 있는 상품 구입로를 개척하고, 1932년에 종로에 4층 건물을 신축하여 경성백화점을 세운다. 그는 경성백화점을 미쓰코시 못지않은 현대식 백화점으로 만들기 위하여 점포 내의 진열과 장식에 특히 중점을 두어 개선하였다. 또한 200여 종업원을 모두 일본인 백화점의 종업원에 뒤지지 않게 훈련시켰고, 손님을 대할 때도 친절하게 하도록 교육하였다. 이러한 친절과 서비스 정신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백화점 신축과 함께 사업 확장을 위해 서울 최대 금은상이었던 '금강상회'를 인수하는데, 이 무렵 금본위제가 폐지되면서 금 시세가 폭등하게되자 엄청난 이익을 보았으며 곧 종로의 조선인 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삼우화학공업 설립

신익상은 남들보다 훨씬 앞서 상업계에 진출한 인물이었지만,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자 대담한 상행위로 새로운 경영 방법을 구사하는 경쟁사들이 등장하면서 백화점만으로 사업은 힘들 것이라 판단한다. 새로운 사업을 발굴하던 중 당시 일본에서 수입해 온 화장품들이 큰 호응을 받았던 것을 떠오르며 직접 화장품 생산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때 와타나베에게 미국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약학을 전공한 기술자 김명식을 소개받게 되고, 신익상은 김명식에게 동업을 제안한다. 뜻이 맞았던 이들은 1934년 삼우화학공업을 함께 설립한다. 여기서 삼우(三友)는 이름은 신익상·김명식·와타나베 세 명을 뜻한다.

1935년 김명식이 배워 온 서양 의약 지식을 바탕으로 과학적인 제조법을 동원해 개발한 화장수 '수안비'[4]를 출시한다. 수안비는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품질이 좋다는 입소문을 타고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곧 중산층 소비자들에게까지 퍼져나가며 베스트셀러 제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곧 당시 조선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던 일본계 화장품 회사들과의 직접적인 경쟁 구도를 형성하게 되었고, 점차 일제 당국의 눈밖에 나게 되면서 삼우화학공업에 행정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익상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수안비의 성공을 발판 삼아 치약, 크림, 파우더 등 생활용품과 기초화장품으로 생산 품목을 넓혀가며 조선 내 토종 화장품 브랜드로서 입지를 다져갔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조선 내 일본인들은 본국 송환 조치의 대상이 되었다. 신익상과 함께 경성백화점삼우화학공업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와타나베는 일제 말기 고조된 반일 감정과 미군정의 강제 송환 정책 앞에서 조용히 서울을 떠나고, 김명식은 삼우화학공업에서 물러나 자신의 회사를 세우며 독자적인 길을 걷는다. 내부의 조력자가 없는 상황에서 홀로 남겨진 기업을 지켜내야 했던 것이었다.

신익상은 이 틈을 기회로 삼으며 "화장품에서 생활용품으로"이라는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된다. 해방 직후 경제적 공백으로 생활 필수품의 극심한 부족에 시달리면서 일제 치하에서 들어오던 물자 공급은 끊겼고, 민간 제조 기반은 극도로 취약해 비누, 치약, 세제와 같은 기본 위생용품조차 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생활용품은 미군이 PX를 통해 들여온 수입품이거나 장날에 떠도는 고가의 외제품에 의존하던 실정이었다. 1947년 신익상은 해외에서 비누 생산 설비를 들여오고 화장품 제조에 쓰던 향료와 화학 원료 기술을 응용하여, '백조비누'를 출시한다. 가격도 수입품에 비해 훨씬 저렴했던 백조비누는 서울과 평양, 대구, 부산 등지의 시장에 납품되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삼우상사 설립과 사망

1950년 6·25 전쟁 발발과 동시에 삼우화학공업 공장은 폭격과 철수 과정에서 파괴되었고, 신익상은 가족과 주요 직원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한다. 사업이 전면 중단된 상황에서 그는 부산에서 마지막 남은 자금 일부를 모아 1952년 삼우상사라는 이름의 무역 회사를 설립한다. 이후 전쟁으로 전국에 흩어진 고철과 탄피, 철제 잔해물들을 수집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철강 자원이 부족했던 일본에 수출하는 사업을 시작한다. 사업을 시작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10억 원이 넘는 이익을 기록했고, 1년 뒤에는 무려 40억 원에 달하는 자산을 축적하며 단숨에 전쟁 이전보다 더 많은 자산을 축적하게 된다.

휴전 이후 신익상은 곧바로 서울로 복귀해 무너진 삼우화학공업경성백화점 등 전쟁으로 붕괴된 기존 사업 인프라를 재건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직접 복구 공사를 진행하면서 건축 자재와 기술, 인력 수급 전반에 대한 노하우를 얻게 되었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을 보며 급격히 늘어날 수요를 감지한 그는 본격적으로 건설업 진출을 결심한다. 1953년 삼우상사 내에 '삼우 토건사업부'를 신설하고, 기존 자사 시설 복구와 병행해 민간 주택과 창고, 공장 등 중소 규모 건축 수주를 시작한다.

1956년 신익상은 전후 복구를 마친 경성백화점의 이름을 차세대백화점으로 변경하며 유통 사업을 새롭게 이어갔다. 같은 해 삼우화학공업 공장도 재건을 마치며 다시 가동에 들어갔고 삼우는 건설, 화학, 유통을 아우르는 중견그룹으로 빠르게 성장한다. 그러나 1958년 오랜 시간 앓아온 폐결핵의 합병증으로 쓰러졌고, 1958년 12월 21일 서울 자택에서 향년 68세으로 세상을 떠났다.


  1. 일상의 삶을 통해서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읽고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대단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뜻이다.
  2. 현 고려대학교
  3. 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4. 현재까지도 삼우생활건강을 통해 생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