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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M그룹 창업주 김선우 金善宇 | Kim Seon-wo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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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20년 3월 13일 |
| 경기도 수원군 (現 경기도 수원시) | |
| 사망 | 1977년 1월 14일 (향년 57세) |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천추각 | |
| 호 | 건산(建山) |
| 국적 | |
| 본관 | 김해 김씨 |
| 학력 | 수원거류민소학교 졸업 수원고등농림학교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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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KM그룹을 창업한 1세대 재벌 기업가로, 유통·물류를 기반으로 금융, 건설, 전자, 유통·서비스 산업까지 확장한 인물이다.
트럭 두 대로 시작한 한성유통을 전국 단위 종합 유통망으로 키웠으며, 이후 한민유통·한민기계·한민생명·한민증권·한민건설·한민전자 등을 설립해 그룹 체제를 갖췄다.
현 KM그룹의 '현장 경영'·'물류·유통 중시'·'공격적 신규 사업 진출' 문화의 뿌리가 되는 경영 스타일을 만든 인물로 평가된다.
생애
유년~청년기 시절
김선우 초대 회장은 1920년 3월 13일, 경기도 수원군 매탄리(현 수원시 매탄동)에서 태어났다. 대지주였던 김준봉의 5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매탄리 일대의 대부분 토지를 소유했던 부친의 덕분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일제강점기 시절을 보낸 그는 수원거류민소학교, 수원고등농림학교를 다니며 농업·토지 관리에 대한 기본 소양을 익혔지만, 관심사는 늘 농기계·수리였다. 전해지는 일화로는 마을 농기계 수리공인 옆집 아저씨를 따라다니며 분해된 트랙터와 양수기를 구경하며 옆에서 함께 일을 도왔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 김준봉은 장남인 그를 농사꾼으로 키우고자 했으나, 김선우는 일찍이 상업과 기계에 대한 관심을 품고 있었고, 이로 인해 부친과의 갈등도 적지 않았다. 김준봉은 "땅만 지키면 평생 먹고는 산다"고 했지만, 김선우는 "땅은 그대로인데, 돈은 사람 따라 움직인다"고 되받아칠 정도로 상업에 대한 집념을 보였다고 한다.
1941년, 김선우는 21세의 나이로 당시 수원 지역에서 규모가 컸던 제방상회에 배달원으로 취업했다. 그는 새벽부터 자정 직전까지 자전거로 물건을 나르며 장부 정리를 돕고, 틈틈이 일본어 상거래 용어와 기초 회계를 배웠다. 성실한 태도와 뛰어난 눈썰미로 빠르게 사내의 주목을 받았고, 단순 배달원에서 창고 관리, 거래처 응대까지 업무를 넓혀갔다. 결국 1945년, 제방상회 사장 이복래의 신임을 얻어 회사 임원으로 승진하게 된다.
1945년, 해방 직후 혼란기에도 그는 투기 대신 기본에 충실한 상거래를 고집했다. 쌀·면직물 가격이 요동치는 가운데서도 "폭리를 남기면 장사는 오래 못 간다"는 신념으로, 일정 마진을 넘기지 않도록 가격표를 직접 손으로 적어 붙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김선우는 평소처럼 출근하여 제방상회를 오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북한군의 남침 소식은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시장은 혼란에 빠졌고, 사람들은 제방상회로 들이닥쳐 곡물이며 비누 한 장이라도 더 쥐려는 눈빛으로 가게를 헤집었다.
이때, 김선우는 2층에 있던 이복래 사장을 깨우고 2층 금고에서 모든 돈과 문서를 가지고 이복래 사장에게 본인과 가족과 함께 피난을 가라고 했고, 본인은 계속 제방상회에 남아 가게를 지키겠다고 했다. 훗날 이때 이복래 사장이 이 모습에 감동하여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싼 가격에 김선우에게 제방상회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며칠 뒤,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뉴스를 라디오를 통해 전해듣자, 군인들과 피난민들이 끝없이 밀려왔다. 김선우는 이때도 매일 밤 창고 앞에서 가게 문을 지켰다.
결국 두달 뒤, 군 작전으로 수원 전역이 강제 철수 지역으로 지정되었고, 결국 제방상회도 문을 닫게 되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대전–보은–함양을 거쳐 부산까지 가는 피난길에 올라야만 했다. 피난 과정에서 그는 '현금과 밥, 그리고 신용장부'만 챙기며, 거래처에 남긴 외상 장부를 끝까지 지키려 했다.
부산에서도 김선우는 물자 교환, 생필품 조달 등 생존에 필요한 실용 감각을 발휘했다. 특히 미군 부대와의 접촉을 통해 남은 군수물자를 들여와 주민들과 나누는 일을 도맡으며, 자연스럽게 물자의 흐름에 대한 감각을 쌓아갔다. 쌀·밀가루·비누·담배 등 품목별로 어느 항구에 무엇이 들어오는지를 손으로 그린 간이 지도에 표시해 두었고, 이 경험이 훗날 전국 유통망 구상의 밑그림이 되었다고 한다.
한성유통 사장 시절
1954년 한국전쟁의 종전 직후, 김선우는 고향 수원으로 돌아온다. 전쟁으로 인해 제방상회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전후 복구와 함께 외국에서 수입되는 각종 물자가 쏟아지던 시기, 그는 외국 물품의 유통에 가능성을 발견한다.
셈이 빨랐던 김선우는 가게를 인수하여 본인이 직접 운영하고자 생각했고, 아버지에게 찾아가 당시 돈으로 40만환을 빌렸다. 이후 이복래 제방상회 사장을 찾아간 김선우는 제방상회를 25만환에 인수하겠다고 했고, 이복래 사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장남과 차남의 이름을 따와 상호를 정하며, '한성상회'를 거쳐 1954년 7월 수원군 매탄리에서 '한성유통'을 개업한다. 이것이 훗날 KM그룹의 시초이다.
휴전 직후 남한 전역에는 미군의 잔여 물자, UN 구호품, 일본 및 홍콩발 소비재가 쏟아져 들어왔다. 당시 대부분의 상인들은 무분별하게 물자를 받는 족족 팔아치웠지만, 김선우는 어느 지역에 어느 물품이 필요한지 매일 노트에 정리하며 공급망과 수요를 정확히 읽었다.
그는 비누, 담배, 구호 쌀, 면직물 등의 생필품은 일괄 수입하여 도 단위로 재분배하고, 미군 PX 잉여 물자는 전쟁 당시 부산에서 미군과 접촉했던 방식과 인맥을 활용하여 중간 도매 없이 확보했다. 재고 카드를 만들어 품목별 입·출고량과 이익률을 일일 단위로 기록했고, 거래처 외상 장부에는 '마감 기일'을 명시해 신용 관리도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지방 소도시 상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유통 계약을 맺고 소형 도시 간 유통망 네트워크를 구성했다. 거래처를 방문할 때마다 그는 "물건은 우리가 책임지고 넣어줄 테니, 손님 잃는 짓은 하지 말라"는 말을 반복했다고 전해진다.
1956년 4월, 그는 수원–인천–대전을 잇는 첫 물류 루트를 지인 이성태의 도움으로 구축하게 된다. 미군기지에서 미군 5톤 트럭 1대를 중고로 구매하고 운전사 2명을 직접 고용하여 도로를 달리며 전국을 누볐다. 이때에도 김선우는 운전사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조수석에 타 함께 다니며 물류 시간표를 손수 기록했다. 식사를 할 때도 트럭 옆에서 도시락을 함께 먹으며 기사들을 '직원'이 아닌 '동업자'라 부르며 대했다.
1958년이 되면, 서울·대전·대구·광주에도 도매 파트너를 확보한 그는 대전에 땅을 사들여 한성유통 1창고, 한성유통 2창고를 세우며 지방 상권의 허브로 성장해 나간다. 이때부터 김선우의 한성유통은 단순히 지방의 소매상이 아닌 전국 유통가의 핵심 허브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1959년, 이때부터 자녀들도 경영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장남 김정한에게 한성유통 본사 회계과장 자리를 준 김선우는 장남에게 한성유통 수본사 경영을 맡기기 시작한다. 당시 20살이던 김정한은 삼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하나도 몰랐기 때문에, 그에게 회계과장 자리를 물려준 것은 도박에 가까웠다.
김정한은 아버지에게 "시장도 다녀본 적이 없고 회사도 운영할 줄 모릅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하자, 김선우는 "직접 부딪히면서 처음부터 배워라, 하면 된다"라고 말했다. 김정한은 의외로 회계과장 일을 잘 소화해냈고, 심지어 수익 흐름과 비용 구조를 정밀하게 분석하여 아버지에게 매일 밤 찾아가 회사의 수익을 갉아먹는 지점을 사실대로 보고했다. 또한 줄여도 될 비용도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보고했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1960년 3월, 21살이 된 김정한에게 한성유통 중부권 사업부장 자리를 맡겼다. 김정한은 중부권 사업부장 자리를 잡자마자 대전·청주·옥천 등의 재고 관리, 물류 계약, 지방 수금 및 재납품까지 도맡게 된다. 이후 한성유통의 '숫자로 말하는 경영' 문화는 김정한을 통해 자리 잡게 된다.
1960년에 한성유통은 전국 지부 15개, 전쟁 직후 대비 수익 12배 성장, 전국 8개 주요 도시 거래처 확보, 직원 80명 돌파라는 성과를 달성하며 기존 수원을 넘어 영남과 충청의 유통 1인자로 부상한다.
한민으로 그룹명을 변경하다
1962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으로 인해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던 시점, 김선우 회장은 사업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다.
1962년 2월, 유통 사업을 하며 친해진 미군 리처드 도슨 소령의 추천으로 미국에서 낡은 기계들을 들여오게 된 그는, 이를 직접 수리하여 재판매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한성기계'[2]라는 새로운 회사를 만들었다. 한성기계는 초기에는 중고 트럭·발전기·펌프를 분해·수리해 재판매하는 사업이었지만, 점차 부품 가공과 단순 조립까지 영역을 넓혀 갔다.
이 회사 성장 과정에서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게 되는데, 김선우의 둘째 아들이었던 김정성이 22살의 나이로 병환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김선우는 둘째 아들 김정성을 "조용했지만 따뜻한 아이였다"라고 회고했다. 장례가 끝난 이후, 김선우는 상호에 아이들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오히려 가슴을 후벼 판다며, 회사 사명을 바꾸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측근들에게 "이제 장사도, 회사 이름도 내 식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 사람들을 위해 써야겠다"고 말하며 '한성'에서 '한민'으로의 사명 변경을 선언했다.
김선우의 선언 이후 한성유통은 한민유통으로, 한성유통창고는 한민유통창고로, 한성기계는 한민기계로 사명을 바꾸었다. 이듬해인 1963년 6월에는 기존 회사들을 지주적 구조로 묶어 ;한민그룹'을 출범시키고, 김선우 한민유통 사장이 임직원의 만장일치로 회장으로 추대된다. 이 때 제정된 그룹 사훈은 '창신선행(創新先行)'으로,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핵심 가치가 된다.
한민그룹 회장 시절
1962년 6월 1일, 전 임직원의 만장일치로 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먼저 회사 내 여러 곳으로 흩어져 있던 부서를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을 실시한다. 그룹 산하에 영업본부, 물류본부, 구매본부, 회계부, 총무부를 갖추었으며,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직원 승진·평가 시스템을 구조화했다.
그는 "가족 회사라도 회사 안에서는 호적보다 호봉이 먼저"라는 말을 남기며, 친족이라도 성과가 없으면 승진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대신 오래 근무한 직원에게는 장기근속 포상과 자녀 학자금 지원을 약속해 충성도를 끌어올렸다.
1963년에는 미군 트럭을 중고로 15대나 보유하고 있었는데, 싼 값에 트럭을 구매했다 보니 고장이 나기 일쑤였다. 김선우는 "남 차 고쳐달라고 울며 매달릴 바엔, 차를 우리가 고치자"는 말로 직접 정비 조직을 갖추자는 결정을 내린다.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조항락에게 평소 교류하던 성진정비소의 정비소장이었던 한동성을 찾아가 "지금 받는 월급의 2배를 주고, 회사 이름에 책임을 지는 '사장' 자리를 줄 테니 함께하자"고 제안하게 지시했고, 결국 한동성을 영입해 한민정비를 설립한다.
또한 계속되는 트럭 대수 증가와 함께 운송 효율을 체감한 김선우는 곧바로 운송업에도 뛰어들었고, 1963년 5월 한민운송을 설립, 당시 본사가 있던 수원 화서동에 한민자동차정비사를 세우게 된다. 한민운송은 한민유통 계열의 전담 운송사이자, 외부 물류도 일부 수주하는 형태로 성장하였다.
1965년에는 일본 이토요카도 본사와 각 매장을 견학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당시 이토요카도는 미국식 할인점 체인을 서서히 도입 중이었고, 김선우 회장도 선진 유통 시스템을 직접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귀국 직후 곧장 영업본부 회의실로 달려간 그는 "한국에도 미국식 할인점 체인이 어울릴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영업본부장을 중심으로 한 달간 서울 중구, 수원, 인천, 대전 등지의 전통시장과 구멍가게 등을 돌아다니며 소비자 구매 습관과 소득 수준을 조사했다. 시장 조사 결과는 '성공 가능성 50%'라는, 애매하지만 도전해 볼 만한 결론이었다. 저소득층 상인들은 "흥정이 안 되면 손님을 잃는다"며 부정적이었지만, 공무원·교사 등 당시 중산층은 고정 가격·영수증 지급에 호의적이었다.
결국 같은 해 10월, 한민슈퍼마켓을 만들기로 하고 수원시 매교동에 한민슈퍼마켓 1호점을 열면서 '한민슈퍼'를 별도 법인으로 설립한다. 한민슈퍼는 초기에는 동네 잡화점과 전통시장의 반발을 샀지만, 일정한 품질·가격, 포인트 적립(도장식 적립) 등을 도입해 중산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었다.
1966년 3월, 김정한 당시 한민그룹 영업본부장이 서울 출장 중 우연히 유통업자에게서 청계천 근처에서 지점 하나로 운영되던 작은 보험회사 '동민상호신용보험'의 매각설을 듣게 된다. 이 회사는 직원 12명의 전국 가입자가 고작 300여 명 남짓이었던 작은 회사였다.
이 사실을 김선우 회장에게 보고하자, 김 회장은 "물류로는 평생 먹고살 수 없다, 우리도 금융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고, 즉시 인수를 지시한다.
1966년 5월, 한민그룹은 동민상호신용보험을 인수하고 사명을 '한민생명'으로 바꾼다. 이는 훗날 KM생명으로 이어지는 보험 계열사의 출발점이다. 초기에는 한민그룹의 자본으로 전국 대도시 지역에 지점을 설치하고 타 보험회사에서 경력 인력을 영입해 규모 확장에 주력했다. 특히 한민유통 전 지점에 한민생명 보험 광고를 내걸고, 유통망을 활용해 보험 상품을 함께 판매하게 했다.
1968년 가을, 김선우 회장은 유통 사업 내 도매업체와 협력점들의 대금 결제가 며칠씩 밀리고 신용 거래 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자 자체 금융 회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 김정한 영업본부장이 증권업 진출을 건의했다.
김선우 회장은 김정한에게 "면허를 가진 증권 회사 하나 찾아오라"고 지시했고, 곧 서울 충무로의 작은 증권사 한 곳이 청산 절차에 들어간다는 소문이 돌자 김정한이 직접 찾아가 협상을 통해 회사를 인수하게 된다. 인수 직후 사명을 '한민증권주식회사'로 바꾸었고, 이는 현재의 KM증권이 된다.
초기 한민증권주식회사는 전통적인 증권사라기보다는 한민그룹 계열 내 도매 거래와 소매업자를 대상으로 한 상품 결제금융, 어음 할인에 집중했다. 이후 197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공모·주식 중개 업무를 시작하며, '지방 상권에 강한 증권사'라는 이미지로 성장하게 된다.
고지혈증을 진단받다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김선우 회장의 라이프스타일은 철저히 '일 중심'이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사옥을 한 바퀴 돌고, 오전에는 본사 회의, 오후에는 지방 지점 순시, 밤에는 장부 결산을 직접 확인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술은 잘 마시지 못했지만 애연가로 하루 2갑은 피우는 습관, 회식 자리의 고기·기름진 음식과 불규칙한 식습관이 쌓이며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1970년 7월, 그는 유난히 피로를 호소하고 아침 회의 도중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일이 발생하자, 비서실의 설득 끝에 서울대병원 VIP 진료를 받았다. 진단 결과는 '중등도 고지혈증', 즉 이상지질혈증이었다. 당시로선 비교적 생소한 질병이었지만, 의사는 단호하게 '지금처럼 계속 일을 한다면 심장이나 뇌혈관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선우 회장은 그날 밤 두 아들 김정한 영업본부장과 김정우 물류부장을 불러 조금씩 경영 승계를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회사는 내 것이 아니라, 일을 같이 한 사람들과 이 나라 손님들의 것"이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다음 날, 김정한 영업본부장을 그룹 부회장으로, 김정우 물류부장을 그룹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이후 그룹 중요 안건은 부회장·사장 결재를 거친 뒤 최종적으로 회장이 재가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해서 김선우 회장이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1972년 10월, 청와대 비서실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이 민간 대기업의 전자 산업 참여를 요청했고, 김선우는 당시 전자가 '미래의 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광주대단지 사건 이후 개발이 추진되던 경기도 성남시 인근 땅을 매입해 1973년 4월 '한민전자'를 설립한다. 초기에는 전축·선풍기 등 소형 가전과 금성사와의 협약을 통해 냉장고 일부 부품을 생산하는 하청 형태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때 김선우 회장은 "우리가 유통으로 벌어들인 돈을 나라의 미래 공장에 심는다"는 취지로 막대한 초기 설비 자금을 투입했다.
1974년에는 그룹 내에서 유통 시장을 넘어 도심 소비 문화 공간으로 진출하는 방안을 논의한다. 김정한 부회장의 제안으로 기존 유통망을 바탕으로 백화점과 관광호텔 설립을 추진했고, 1975년 4월에는 한민백화점 수원점, 1975년 10월에는 당시 지하철 1호선 종점이었던 청량리역 인근에 '한민관광호텔 청량'을 개장한다.
이 무렵 그는 공식 직함은 회장이었지만, "새 사업은 젊은 사람에게"라는 말로 신규 사업의 방향만 잡아 주고 실행은 실무진에게 맡겼다고 알려져 있다.
1975년, 정부의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하에 건설부(現 국토교통부)에서 민간 건설 참여 확대 정책 문건이 나오자, 김선우 회장은 "창고를 사용하던 회사에서, 남의 창고까지 지어주는 회사가 되자"며 건설업 진출을 결심한다.
동년 6월 9일, 한민건설을 설립하고 첫 수주로 충북 청원군(현 청주시 청원구)에 '한민물류 4센터'신축 공사를 따낸다. 기존 건설사 대신 한민건설이 직접 시공한 결과 예산 17% 절감, 공사 기간 2개월 단축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프로젝트는 이후 공공 프로젝트 수주의 발판이 되었고, 건설부·조달청 관계자들에게도 한민그룹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1975년 말, 국방부 산하 조달본부에서 논산훈련소 관사 신축 입찰에 참가한 한민건설은, 당시로서는 드문 신생 기업으로서 입찰에 성공한다. 결과적으로 6개월 만인 1976년 2월, 논산훈련소 관사 2개 동 신축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공하게 되며, 이 프로젝트는 김정우 사장이 독자적으로 이끈 첫 공공 프로젝트로 기록된다. 이 일을 계기로 김선우 회장은 김정우 사장에게 "이제 네 이름으로 일감을 따와도 되겠다고" 처음으로 노골적인 칭찬을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1975년에는 평창동 집무실 '천추각'이 완공되었다. 1973년 가을, 김선우 회장은 서울 평창동 북쪽 자락의 한적한 언덕을 걷다 "이곳에 집무실을 지어야겠다"고 조항락 비서실장에게 말했고, 본사도 서울로 이전하는 계획을 세운다.
그는 건축가 김중업을 찾아가 전통과 현대를 결합하는 기법을 사용해 집무실을 지어달라고 의뢰했고, 1975년 11월 평창동에 천추각이 완성된다. 천추각은 이후 한민그룹·KM그룹 역대 회장들이 집무한 상징적 공간이자, 김선우의 말년을 함께한 장소가 된다.
사망
김선우의 공식적인 사망일은 1977년 1월 14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계열사 사사(社史)와 가족 회고록에 따르면, 1월 7일 새벽 천추각 집무실에서 심장마비 증세로 쓰러진 뒤 일주일간 연명 치료를 받다가 14일 새벽 숨을 거두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 때문에 일부 기록에는 1월 7일, 일부에는 1월 14일로 사망일이 혼재해 있으며, 현재는 병원 사망진단서 기준인 14일이 공식 사망일로 통일되어 있다.
장례는 유족과 한민그룹 명의의 '그룹장' 형식으로 조용히 치러졌다. 빈소는 서울대학병원에 차렸고, 재계·관가 인사들이 조문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조문 대신 조화를 보내고, 이후 김선우 회장에게 금탑산업훈장을 추서한다.
유해는 고향인 수원 매탄리 인근 가족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후 한민그룹·KM그룹은 그의 기일인 1월 중순마다 사내 추도식을 열어 '건산 정신'을 되새기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경영 철학
김선우 회장의 경영 철학은 크게 3가지로 요약되는데 '현장, 신용, 사람'이다.
- 현장 경영
그는 임원들에게 "지도보다, 먼지 묻은 트럭 타이어가 더 정확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본사 회의보다 창고·매장·공사 현장을 더 중시했고, 지방 출장 시에는 별도의 의전 차량이 아닌 화물 트럭이나 영업 차량을 타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문화는 이후 KM그룹의 CEO 현장 순시 전통으로 이어졌다.
- 신용 중시
전후 혼란기에 외상 거래와 채무 불이행이 비일비재하던 시기에도, 김선우는 "한 번 어긴 약속은 열 번 거래해도 못 갚는다 며 채권·채무를 엄격히 처리했다. 대신 거래처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상환 기한을 조정해 주거나, 물류·재고 관리 개선을 도와 재기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 때문에 '무서운 채권자이자, 따뜻한 스승'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사람에 대한 투자
그는 학력이 낮더라도 성실한 직원에게 과감히 책임을 맡겼다. 상업고등학교 졸업 직후였던 장남 김정한을 곧바로 회계과장에 앉힌 일, 정비소 소장을 통째로 영입해 사장 자리를 맡긴 일 등이 대표적 사례다. 1970년대 이미 사내 장학제도, 직원 자녀 장학금, 장기근속 포상 등을 도입해 인력 유출을 막았다.
평가
재계·학계에서는 김선우를 "전후 한국 유통·물류 기반을 다진 1세대 기업가"로 평가한다. 중후장대 산업 위주의 성장 전략 속에서도, 그는 물류·유통·서비스업을 산업화의 필수 인프라로 보고 투자했다는 점에서 다른 재벌들과 차별화된다.
다만 가족 중심의 지배 구조와 강한 오너십, 의사 결정의 밀실성은 한계로 지적된다. 후계 구도에서 일부 친족·경영진 간 갈등이 있었다는 증언도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룹이 이후 수차례 위기 속에서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편해 온 배경에는, 김선우가 초기부터 '유통–물류–금융–제조'의 선순환 구조를 지향했던 전략적 안목이 있었다는 평가가 많다.
어록
“지도보다 먼지 묻은 타이어가 더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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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한성유통 본사 회의 中 |
“한 번 어긴 약속은, 열 번 거래해도 못 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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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한성유통 채무점검 회의 中 |
“창고만 짓지 말고, 사람들 마음까지 길을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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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9월, 대전 한성유통 1창고 준공식 中 |
“회사 돈은 내 돈이 아니고, 나한테 잠깐 맡겨 놓은 손님들 밥값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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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그룹 신년사 中 |
“현장에 가서 욕을 먹어야 진짜 책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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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2월, 논산훈련소 관사 신축 공사 완료 후 한민건설 간부들과 뒤풀이 자리 中 |
“내 이름은 없어져도 회사 이름은 남게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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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가을, 조항락 비서실장에게 |
여담
- 호 건산(建山)은 "산을 세운다"는 뜻으로, 전후 폐허 속에서 다시 나라 경제의 기초를 쌓겠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전해진다.
- 다만 그룹 내부에서 김선우는 공식 호인 '건산(建山)'보다 '사장님'또는 '트럭 사장'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렸다. 그는 외부에서 자신을 "재벌 회장님"이라 부르는 것을 싫어해, "나는 장사꾼일 뿐이오"라고 고쳐 부르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 의외로 평생 운전면허를 취득하지 않았다. 다만 새로 들여온 트럭이 들어오면 꼭 직접 조수석에 타 보고 "이 트럭은 어디까지 갈 수 있겠나"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때 나온 답변을 토대로 대략적인 물류 루트와 운행 시간을 머릿속에 그려 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건강이 나빠진 이후에도 지방 출장을 가면 고급 식당 대신 기사식당, 시장 국밥집을 찾았다고 알려져 있다. 비서실이 식단을 조절하라며 말리면 "같은 밥을 먹어야 같은 말을 할 수 있다"고 답했다.
- 취미는 낚시와 장부 정리였다고 할 정도로, 장부를 직접 들여다보는 것을 즐겼다. 지방 출장을 가서도 숙소에 돌아오면 그날 거래·물류 상황을 수첩에 옮겨 적는 습관을 평생 유지했다.
- 말년의 천추각 집무실 책상 서랍에서는 손글씨로 적힌 '건산수첩'이 여러 권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직원·거래처 이름과 함께 "이 사람은 끝까지 믿어도 된다", "이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주라"와 같은 메모들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