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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8일 (수) 14:4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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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M그룹 회장 직무 대행 김정한 金正干 | Kim Jeong-han | |
|---|---|
| 출생 | 1939년 8월 1일 |
| 경기도 수원군 (現 경기도 수원시) | |
| 사망 | 2025년 3월 7일 (향년 86세) |
| 미국 LA | |
| 국적 | |
| 본관 | 김해 김씨 |
| 학력 | 매산국민학교 (졸업) 수원중학교 (졸업) 삼일상업고등학교(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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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KM그룹 초대회장인 김선우 회장의 장남이자 KM그룹 회장 대행을 역임했다.
유년기 ~ 청년 시절
김정한은 1939년 8월 1일, 경기도 수원군(現 경기도 수원시)에서 태어났다. 한민그룹 창업주인 김선우의 장남으로, 집안은 당시 지역에서 손꼽히는 부유층이었다. 매산국민학교, 수원중학교, 삼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상업·회계 분야에 두각을 나타냈다. 또한 김정한은 공부에는 소질이 없었다. 당시 김선우 회장은 김정한을 해외로 유학을 보내줄 생각이었지만 공부에 별 흥미가 없던 그는 결국 상고를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한성유통 회계과장·사업부장 시절
1959년, 20세가 된 김정한은 삼일상업고등학교를 갓 졸업하자마자 부친 김선우 회장의 결정으로 한성유통 수원본사 회계과장 자리에 올랐다. 당시로서는 고등학교 졸업자가 곧바로 회사의 핵심 보직을 맡는 경우가 드물었고, 특히 회계과장은 매출·비용·재고를 총괄하는 자리였기에 '무경력 신입'에게 맡기는 것은 사실상 도박에 가까운 인사였다. 그러나 부친은 "현장에서 부딪히며 배워야 진짜 경영을 안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고, 상업고등학교에서 배운 회계 지식을 믿고 과감히 중책을 맡겼다.
처음엔 장부 정리와 수금 일정 관리조차 버거웠지만, 김정한은 곧 수익 흐름과 비용 구조를 스스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는 하루를 마감할 때마다 본사 금고 앞에서 장부를 펼쳐놓고 수익을 갉아먹는 비효율을 찾아냈다. "어느 거래처에선 외상 기간이 지나치게 길다", "창고 유지비가 계절별로 과다하게 지출된다" 등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했고, 심지어 불필요한 경비를 줄일 수 있는 방안까지 제시했다. 이 내용은 매일 밤 부친에게 직접 보고되었고, 김선우 회장은 "숫자만 보는 줄 알았더니, 흐름을 읽는 눈이 있다"라며 그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석 능력과 성실성 덕분에 1960년 3월, 불과 1년여 만에 그는 한성유통 중부권 사업부장으로 발탁되었다. 당시 한성유통은 전국적인 유통망을 확장하던 시기였고, 중부권 사업부는 대전·청주·옥천 등 충청권 주요 거점을 포함해 남북 물류의 허리를 담당하는 전략 지역이었다.
사업부장에 오른 김정한은 대전과 청주 창고 재고를 직접 점검하고, 거래처를 일일이 방문해 미수금을 회수하는 등 발로 뛰는 행정을 시작했다. 대전에서 새벽 기차로 올라와 곧바로 청주로 향하고, 저녁에는 옥천 소매상과의 재계약 협상을 진행하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물류 계약서 한 장을 작성할 때도 운송 거리, 창고 회전율, 거래처의 신용도를 계산해가며 조건을 조율했다.
이 시기 김정한은 단순히 회계·장부를 관리하던 관리형 인물에서, 현장과 재무를 동시에 다루는 실무형 인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본사 중심의 사고와 재무적 안정성을 우선시하는 성향을 유지했으며, 이는 훗날 경영권을 잡았을 때 장단점이 동시에 드러나는 원인이 되었다.
1962년, 김선우 회장의 차남이자 김정한의 동생이었던 김정성이 향년 22세로 사망하였다. 김선우 회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정한이가 나보다 더 오랫동안 정성이의 옆을 지켰다. 정한이도 매일 대전과 청주 출장을 다녔지만 꼭 밤이 되면 정성이가 있는 수원 병원을 찾아와 인사를 하고 갔다. 또한 임종을 지켰던 것도 내가 아닌 정한이였다."라고 회고했다.
김정성의 사망 이후 한성이었던 그룹 사명을 한민으로 변경하였다. 하지만 이때 당시 김정한은 사명을 변경하는 것에 충격과 허무함을 가져다주었다. 한성이라는 이름은 그에게 있어 어린 시절부터 곁에 있었던 가문의 상징이었다. 김정한은 훗날 "아버지가 회사 이름을 바꾸겠다고 할 때, 속으로는 복잡했지만, 그것이 결국 우리 집안이 한국 사회 속에서 살아남는 길이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사명 변경 이후에는 김정한은 중부권 사업부장으로서 '한민'이라는 이름을 지방 거래처에 알리는데 주력했다.
한민그룹 영업본부장 시절
1966년 1월, 신년 정기인사에서 김정한은 그룹 중부권 사업부장 타이틀을 단지 6년만에 그룹 영업본부의 본부장 직으로 승진했다.
1966년 3월, 그는 서울 출장 중 청계천 근처에 장사를 하던 도매업자와 차를 마시던 자리에서, 지점 하나로 운영되던 작은 보험회사인 '동민상호신용보험'의 매각섯을 우연히 듣게 된다. 직원 12명, 전국 가입자 1,000여명에 불과했던 소규모 회사였지만, 그는 이 정보를 즉시 본사로 타전했다.
며칠 뒤 김선우 회장에게 이를 보고하자, "물류로는 평생 먹고살 수 없다, 우리도 금융을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김정한은 그 자리에서 인수 조사 지시를 받았고, 두달 뒤 한민그룹은 '동민상호신용보험'을 인수해 '한민생명'으로 사명을 변경한다. 김정한이 영업본부장 자리에서 처음 단행한 일이었다. 이후 김정한은 이 새로운 계열사의 전국 시장 확장 총괄 자리를 맡게 된다.
1967년, 김정한은 한민유통 거래처에 상품 공급 계약을 맺을 때, 한민생명 단체보험 가입을 묶는 패키지 계약을 시도했다. "물건과 보험을 함께 공급한다"는 전략은 일부 소매상에서 반발을 샀지만, 장기적으로 거래처 충성도를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직접 김정한은 지방 순회에 나서며 거래처 사장들에게 "이건 장사만이 아닌, 당신과 당신 가족의 안전망 역할"이라고 설득했다.
1968년, 김정한은 김선우 회장에게 "보험만으로는 금융의 큰 그림을 그리기 어렵다, 또한 대금 결제가 밀리고 있다"라는 이유로 증권업 진출 필요성을 건의했다. 이를 계기로 투자중개업체 인수를 알아보게 된 김정한은 서울 충무로의 작은 증권사가 청산 절차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을 듣자마자 찾아가, 인수하여 '한민증권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했다.
그룹 부회장 시절
1970년 7월, 부친 김선우 회장이 '중등도 고지혈증'을 진단받고 쓰러진 사건으로 그룹 경영권 구도에 중대한 변화를 불러옸다. 김선우 회장은 고지혈증 진단 이후 장남 김정한을 그룹 부회장으로, 삼남 김정우를 그룹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이로써 김정한은 본사·재무·영업총괄을 맡고 김정우는 현장·물류·신규 사업 집행을 맡는 이원화 경영 체제거 형성되었다.
부회장에 오른 김정한은 첫 그룹 경영 전략회의에서 매출, 비용, 재무지표를 중심으로 그룹을 관리했다. 그는 김선우 히장의 건강 악화로 "지금은 확장보다 안정이 필요하다"는 기조를 내세웠고, 각 계열사에 예산 집행 계획과 비용 절감안을 제출하게 지시했다. 당시 현장에서는 "기회를 놓친다"는 불만도 많이 제기되었지만 함축시켰다.
1972년 10월, 청와대 비서실을 통해 박정희 정부는 대기업의 전자산업 참여를 요청하자, 김선우 회장은 즉시 김정한 부회장을 시켜 성남 땅을 매입하여 전자사업 진출을 준비했다.
한민전자 출범 당시에서 김정우 사장과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는데, 김정한 부회장은 "전자산업은 유망하지만 초기 설비투자와 부품 공급 계약에서 확실한 마진 구조를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김정우 사장은 "미래가 유망하니 초기 적자는 감수하고 투자를 공격적으로 해야한다"라는 입장으로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다.
1974년, 그룹 내에서 유통을 넘어 백화점과 관광호텔 등의 진출 논의가 시작되자 김정한은 영업본부 출신답게 기존 유통망과 소비 패턴 분석 자료를 기반으로 시장 타당성 보고서를 작성했다. 수원 매교동에 한민백화점 1호점, 청량리역 인근에 한민관광호텔 청량 개관이 결정될 때, 그는 입지 분석·운영 구조 설계에 깊이 관여했다.
1975년, 김선우 회장이 건설부의 민간참여 확대 정책에 관한 문건을 보고 한민건설 설립을 결심했을 때, 김정한은 "시공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대규모 건설에 뛰어드는 것을 위험하다, 건설업 진출을 보류하자"고 신중론을 폈다. 하지만 김선우 회장과 김정우 사장은 건설업 진출 및 경험이 없어도 일단 수주를 받자고 주장했고, 결국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민건설이 출범하였다.
김정한은 이후에도 건설 예산을 대폭 삭감하는 등 보복 조치를 단행했으나, 김정우 사장이 이끈 논산훈련소 관사 신축 프로젝트의 대성공으로 내부 입지가 김정우 사장에 대비하여 약화됐다.
회장 직무대행 시절
1977년 1월 14일, 향년 57세로 부친이자 1대 회장인 김선우 회장이 사망하였다. 사망 이후 1월 19일, 긴급 이사회가 개최되었고 조항락 비서실장의 결정과 만장일치로 그룹 회장 직무대행을 맡게 되었다.
1977년, 김정한은 회장 대행에 취임하자마자 무작정으로 회산 예산 감축을 지시하고 긴축 경영 체제에 들어간다. 당시 한국은 박정희 정부로 인해 고도의 성장기 시기였지만, 김정한은 무작정 삭감을 지시했다. 당시 한민건설은 논산훈련소 신축 공사 이후 다음 수주를 따내기 위해 투자가 절실환 상황이었지만 김정한은 매일 한민건설 사장을 불러 예산 삭감을 지시했다.
결국 한민건설은 다음 수주인 성수대교 개발 공사 수주를 실패하게 된다. 이때 김정우 당시 시장은 형을 찾아가 예산을 건설만이라도 원상복구하라고 말했지만 김정한은 말을 듣지 않았다. 30여년 뒤인 2010년, 당시 한민건설 사장에 증언에 의하면 김정한은 건설 예산을 삭감하여 그 돈으로 정치계 로비와 본인의 비자금을 마련할려고 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1977년 10월, 일본 노무라 증권 은행장에 유혹에 넘어가 그룹의 막대한 규모의 자본을 당시 단기 고수익 외화 회사채에 투자하게 된다. 당시 그룹 경영실에서 극구만류했지만 김정한은 경영실장을 해임하면서까지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투자를 했던 회사가 파산하게 되면서 결국 김정한은 회삿돈 당시 100만달러 규모(현재 가치로 약 600만달러)를 잃게 된다, 그룹은 언론에 로비를 하며 이 사건을 외부로 퍼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결국 언론에 보도가 되었고 결국 회사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후 김정한은 이 사안에 대해 "시장 리스크였지 내 책임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했고 김정한의 리더십이 그룹 내부에서 흔들리게 된다.
1978년에 김정한은 회사를 장악하기 위해 아버지 김선우 회장과 처음부터 일해오던 계열사 사장 및 임원 7명을 강제 전보 조치 및 해임 조치를 하고 그 자리에 본인의 사람을 앉히게 된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물류부문 임원이었던 주현인이 김정한이 계열사 간 자금 순환을 이용하여 회사채 투자 사건의 손실을 매꾸고 본인의 비자금을 마련할려고 했다고 언론에 폭로했다.
1979년에는 정계 로비를 통해 한민관광호텔 청량 인근 부지를 값싸게 매입하고 그 자리에 로비를 통해 공공사업 부지로 선정하고 한민건설이 수주하기로 했지만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다. 결국 1979년 7월 3일, 이사회 안건으로 김정한 회장의 부회장직 및 회장 대행 해임건이 올라왔고 찬성 11표, 반대 2표로 결국 해임되고 며칠 뒤 김정우 사장이 그룹 회장직에 선임되는 안건이 올라오자 만장일치로 회장으로 추대 되었다.
미국 출국
1979년 7월 3일, KM그룹 이사회에서 회장 대행 및 부회장직에서 공식 해임된 김정한은 같은 해 9월 1일 미국 LA로 출국한다.
그룹은 공식적으로 '건강 악화로 인한 장기 요양'이라는 입장을 발표 했으며, 그의 출국은 대대적인 언론 보도 없이 조용히 진행되었다.
미국에서 은둔생활을 이어가던 김정한은, 1985년 4월 LA에서 함께 거주하던 부인 임지연 씨가 난소암으로 별세하며 사별하게 된다.
이 시기 그는 종교 활동에 심취하며 한인 교회를 중심으로 제한된 사회생활을 이어갔고, 가끔 과거 재계 인맥들과 골프 또는 식사 자리를 가지는 정도였다.
그러던 1993년 가을, LA 한인 미술관 후원 행사에서 한세령을 만나게 된다. 이후 1년간의 교제 끝에 1994년 9월, LA 베벌리힐스 근교 한 교회에서 비공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하지만 당시 그룹에서는 가족 중 유일하게 김정우 회장과 김보라 여사가 LA로 출국 후 참석하며 한국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당시 일부 언론에서는 "형제의 화해 신호"라며 보도하였지만 이후 경영 복귀나 귀국 시도는 없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LA 한인을 취재하러간 기자들 사이에서 발견되며 LA 한인타운 인근 고급 주택가에 거주한 것이 확인되었다.
한세령 여사와 함께 미국 미술계 후원, 골프 모임, 한인 장학재단 활동 등을 이어갔으며 전처 소생인 3명의 자녀와 함께 조용히 지냈다.
2010년, 당시 KM 경영권 불법 승계 사건이 터지며 한국 기자들이 언론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2014년, 김정우 회장이 타계하자 공식 입장 없이 침묵하던 그는, 장례 셋째 날 그룹 비서실로 편지 한통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이후 한국으로 입국하여 장례식 등은 참석하지 않았고 애도한다는 공식 입장만 내놓았다.
회장 대행직 해임 이후 41년간 침묵을 지켰던 김정한은, 2020년 9월 12일 《재외동포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해임 후 처음으로 공개적인 입장을 밝혔다.
인터뷰 내용을 요약해보자면 주로 과거 KM그룹 내 권력 갈등, 동생 김정우 회장에 대한 평가, 그리고 자신의 후회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그 회사를 만든 건 우리 아버지였지만 나는 돈을 선택했고, 회사를 선택한건 정우였다.
지금도 나는 그 선택을 한 내가 너무 밉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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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12일 《재외동포신문》 인터뷰 中 |
또한 김정우 회장의 죽음을 회고하며 "형으로서 도망쳤고, 동생은 끝까지 책임졌다"고 평가하며, 자신은 "죄인의 말년을 살고 있다"고도 말했다.
사망
2025년 3월 24일 오전 6시 10분(현지시간), LA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KM그룹에서 장례식을 지원했으며 조용히 가족장으로 진행했지만 김태연 회장을 더불어 모든 가족이 LA로 출국하여 장례를 함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