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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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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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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남 2녀 중 삼남
| 형 [[김정한]], 김정성, 김정수 <br> 여동생 김자영, 김자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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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보라
| 김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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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남 '''[[김태연]]'''<br>차남 김태영<br>장녀 김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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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width: 100px; background: #7f595b; color: #FFF;" | 장지
| 경기도 수원시 건산 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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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유통 물류부장 <small>(1968~1970)</small><br>한민그룹 사장<small>(1970~1979)</small><br>한민그룹 회장 <small>(1979~2014)</small>
| 한성유통 물류부장 <small>(1968~1970)</small><br>한민그룹 사장<small>(1970~1979)</small><br>한민그룹 회장 <small>(1979~2014)</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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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군 중위 전역 <small>(사후 44기)</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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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
=== 유년~청년기 시절 ===
=== 유년~청년기 시절 ===
1943년 5월 17일, 경기도 수원군(현 수원시)에서 창업주 [[김선우]]와 이해린 사이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막내"였으나, 일찍이부터 형들과 다른 기질을 보였다. 장남 [[김정한]]이 재무에 강점을 두었다면, 김정우는 실무와 물류의 강점이 있었다.
1943년 5월 17일, 경기도 수원군(현 수원시)에서 창업주 [[김선우]]와 이해린 사이의 막내로 태어났다.
장남 [[김정한]]이 재무와 숫자에 강점을 보였다면, 김정우는 어릴 때부터 사람·현장·물류에 밝았다고 회고된다.


수원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에서 유학하며 당시 일본 대기업들의 재벌식 경영·전자산업 성장 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이 경험은 훗날 그의 공격적 사업 확장의 배경이 된다.
매산국민학교, 수원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거치며 성적은 상위권이었으나,"시험공부보다 장부 보는 게 더 재미있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고등학교 시절 이미 아버지 회사를 드나들며 트럭 배차표, 재고 장부, 외상장부를 구경하곤 했다고.
 
와세다대학 상학부 유학 시절에는 일본 대기업의 재벌식 경영과 전자 산업의 초기 성장 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와세다 재학 중 휴학을 내고 일본 상사 회사 창고에서 6개월간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때의 경험이 훗날 ""현장은 책상 이긴다"는 그의 신념으로 이어졌다는 평가가 많다.


=== 한성유통 입사 ===
=== 한성유통 입사 ===
귀국 후 1968년, 한성유통의 물류부장으로 입사하며 처음 경영에 뛰어들었다. 초기에는 유학한 지식을 바탕으로 현장과 물류로 총괄했다.  
귀국 후 1966년, 공군 중위로<REF>공식 프로필상으로는 '공군 중위 전역'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육군 계엄사령부 헌병지원대 배속이었다는 증언도 있어 논란이 있다.</REF>복무를 마친 뒤 1968년 한성유통 물류부장으로 입사하며 처음으로 경영 실무에 참여했다.
 
입사 초기에 그는 수도권·충청권 도매상 및 소매상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거래 조건을 다시 쓰게 만든 인물로 유명하다. 그가 취임한 뒤 한성유통의 재고 회전율과 회수 기간이 대폭 개선되었고, 아버지 [[김선우]]는 ""정우는 머리보다 발로 돈을 벌 줄 아는 놈"이라며 물류·현장 관련 권한을 크게 위임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김선우]] 회장이 1970년 고지혈증을 진단받자 한성유통 물류부장에서 그룹 사장으로 승진시킨다. 형 [[김정한]]재무와 본사를 맏고 김정우는 현장을 돌아다니며 이원화 경영 체제를 이끌며 본격적으로 경영 전면에 등장했다.
1970년 [[김선우]] 회장이 고지혈증 진단을 받자, 한성유통 물류부장에서 그룹 사장으로 전격 승진한다.
형 [[김정한]]재무와 본사 경영을 맡고, 김정우는 계열사와 현장을 돌며 이원화 경영 체제를 구축했다.


=== 형제의 난 ===
=== 형제의 난 ===
김선우 회장의 사망 이후, 1977년 1월 19일 한민그룹 긴급 이사회가 개최된다,
김선우 회장 사망 이후인 1977년 1월 19일, 한민그룹 긴급 이사회가 개최된다.
당시 유언으로 남긴건 없었지만 김선우 회장은 조항락 비서실장에게 "너가 경영을 잘할거 같은 놈으로 물려줘라, 그래도 정한이가 더 나은 것 같다"라는 말을 남겼다.
유언장은 없었지만, 김선우는 생전 비서실장 조항락에게 "네가 보기에도 경영 잘할 놈에게 맡겨라. 그래도 정한이가 장남이니 먼저 생각해 봐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긴급 이사회의 만장일치로 김정한 부회장이 그룹 회장 대행을 맡게된다.
하지만 김정한 부회장은 유흥을 좋아했고 그룹 경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또한 돈을 만지는 것만 관심이 있었지 현장 상황은 아무것도 몰랐다.
반면 김정우 사장은 현장을 돌아다니며 실무에서 직원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고, 그룹 경영의 야망이 있었다.


1977년 김정한은 회장 대행에 취임하자마자 무작정으로 회사 예산을 모두 감축하고 긴축 경영 체제에 들어간다, 당시 한국은 박정희 정부로 인해 고도의 성장기 시기였고 특히 건설사에 투자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사회는 장남 김정한 부회장을 만장일치로 회장 직무대행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김정한]]은 유흥과 재테크에만 관심을 보였고, 그룹 경영과 현장에는 무관심했다.
특히 김정한은 한민건설 사장을 불러 무작정 삭감을 지시했고 결국 다음 수주를 따내는데 실패하게 된다, 이때 김정우 사장은 바로 형에게 달려가 화를 내며 당장 원상복구하라고 말을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반면 김정우는 현장을 직접 뛰며 계열사 임직원들에게 신망을 쌓고 있었고, 그룹 경영권에 대한 의지도 강했다.
30여년 뒤 당시 한민건설 사장에 증언에 의하면 김정한은 건설사 예산을 삭감하여 그 돈으로 정치계 로비와 본인의 비자금을 마련할려고 했다고 말했다.


1977년 10월, 김정한은 외국계 투자은행장에 유혹에 넘어가 그룹의 막대한 규모의 자본을 단기 고수익 외화 회사채에 투자하게된다, 당시 그룹 경영실에서 극구만류했지만 김정한은 경영실장을 해임하면서까지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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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시 투자를 했던 회사가 파산하게 되면서 결국 김정한은 회삿돈 당시 100만달러 규모(현재 가치로 약 600만달러)를 잃게 된다, 그룹은 언론에 로비를 하며 이 사건을 외부로 퍼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결국 언론에 보도가 되었고 결국 회사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후 김정한은 이 사안에 대해 "시장 리스크였지 내 책임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했고 김정한 리더십이 흔들리게 된다.
 
1978년에 김정한은 회사를 장악하기 위해 아버지 김선우 회장과 처음부터 일해오던 계열사 사장 및 임원 7명을 강제 전보 조치 및 해임 조치를 하고 그 자리에 본인의 사람을 앉히게 된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물류부문 임원이었던 주현인<ref>김선우의 오른팔이라고도 불렸던 인물</ref>이 김정한이 계열사 간 자금 순환을 이용하여 회사채 투자 사건의 손실을 매꾸고 본인의 비자금을 마련할려고 했다고 언론에 폭로했다.
 
1979년에는 정계 로비를 통해 한민관광호텔 청량 인근 부지를 값싸게 매입하고 그 자리에 로비를 통해 공공사업 부지로 선정하고 한민건설이 수주하기로 했지만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다.
결국 1979년 7월 3일, 이사회 안건으로 김정한 회장의 부회장직 및 회장 대행 해임건이 올라왔고 찬성 11표, 반대 2표로 결국 해임되고 며칠 뒤 김정우 사장이 그룹 회장직에 선임되는 안건이 올라오자 만장일치로 회장으로 추대 되었다.
 
3년간 이어진 형제 간 권력 투쟁은 결국 막내 김정우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형인 김정한은 미국 LA로 출국하여 결국 사망 전까지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


=== 한민그룹 회장 시절 ===
=== 한민그룹 회장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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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그룹은 유상증자와 회사채 발행을 단행했으며, 자산유동화증권(ABS)을 활용해 단기 자금 압박을 완화하였다. 비핵심 부동산과 유휴 자산은 매각했으나, 한민건설과 한민중공업 등 전략 부문은 유지하였다. 유통·카드·리조트 부문은 멤버십·마일리지 제도를 통합하여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확보했다.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그룹은 유상증자와 회사채 발행을 단행했으며, 자산유동화증권(ABS)을 활용해 단기 자금 압박을 완화하였다. 비핵심 부동산과 유휴 자산은 매각했으나, 한민건설과 한민중공업 등 전략 부문은 유지하였다. 유통·카드·리조트 부문은 멤버십·마일리지 제도를 통합하여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확보했다.


1998년에는 닷컴 열풍이 불어와 인터넷과 정보통신 산업이 급격히 성장하자, 그룹은 [[KM벤처투자|한민벤처투자]]를 설립하여 IT·인터넷 기업 투자에 나섰따 이는 당시 재계 전반에 걸친 벤처투자붐에 발맞춘 전략이었다.
1998년에는 닷컴 열풍이 불어와 인터넷과 정보통신 산업이 급격히 성장하자, 그룹은 [[KM벤처투자증권|한민벤처투자]]를 설립하여 IT·인터넷 기업 투자에 나섰따 이는 당시 재계 전반에 걸친 벤처투자붐에 발맞춘 전략이었다.


199년,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자금난을 겪던 [[현대전자]]는 TFT-LCD 사업부 매각을 추진하였다. 김정우 회장은 이를 인수하여 그룹 전자 계열로 편입시켜 2000년 1월 [[KMDISPLAY|한민디스플레이]]를 설립하였다. 이는 기존 가전 및 반도체 사업과의 시너지를 염두에 둔 결정으로, 한민그룹은 디스플레이·반도체·가전의 전자 3대 축을 확보하게 되었다.
199년,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자금난을 겪던 현대전자는 TFT-LCD 사업부 매각을 추진하였다. 김정우 회장은 이를 인수하여 그룹 전자 계열로 편입시켜 2000년 1월 [[KMDISPLAY|한민디스플레이]]를 설립하였다. 이는 기존 가전 및 반도체 사업과의 시너지를 염두에 둔 결정으로, 한민그룹은 디스플레이·반도체·가전의 전자 3대 축을 확보하게 되었다.


2000년에는 IMF 외환위기로 인해 채권 추심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KM신용정보|한민신용정보]]를 설립하며 채권 관리·추심 대행업에 진출하였다. 또한 그룹 내 흩어져 있던 연구 조직을 모두 통합하여 한민경제연구소를 출범시켰고, 임직원 교육과 인재 양성을 위해 한민인재개발연구원을 설립하였다.
2000년에는 IMF 외환위기로 인해 채권 추심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KM신용정보|한민신용정보]]를 설립하며 채권 관리·추심 대행업에 진출하였다. 또한 그룹 내 흩어져 있던 연구 조직을 모두 통합하여 한민경제연구소를 출범시켰고, 임직원 교육과 인재 양성을 위해 한민인재개발연구원을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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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한민그룹은 IMF 외환위기 이후 선택과 집중 경영 전략의 일환으로 건설 및 중공업 부문을 별도 그룹으로 분리하였다. 당시 그룹은 유통, 금융, 전자 계열의 자원을 집중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설비 투자와 경기 변동성이 큰 건설·중공업 부문을 계열에서 떼어내기로 결정하였다.
2001년, 한민그룹은 IMF 외환위기 이후 선택과 집중 경영 전략의 일환으로 건설 및 중공업 부문을 별도 그룹으로 분리하였다. 당시 그룹은 유통, 금융, 전자 계열의 자원을 집중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설비 투자와 경기 변동성이 큰 건설·중공업 부문을 계열에서 떼어내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2001년 7월, 한민건설과 한민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한민건설그룹이 출범하였으며, 경영은 창업주 [[김선우]]의 3남이자 김정우 회장의 형인 [[김정수]] 당시 한민건설 부회장이 맡게 되었따.
이에 따라 2001년 7월, 한민건설과 한민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한민건설그룹이 출범하였으며, 경영은 창업주 [[김선우]]의 3남이자 김정우 회장의 형인 [[김정수]] 당시 한민건설 부회장이 맡게 되었다.


분리 과정은 지분 정리를 통해 이뤄졌는데, 김정우 회장 일가는 금융, 전자, 유통 계열사의 지분을 보유하고, [[김정수]] 건설그룹 회장 일가는 건설 및 중공업 계열 지분을 정리하였다.
분리 과정은 지분 정리를 통해 이뤄졌는데, 김정우 회장 일가는 금융, 전자, 유통 계열사의 지분을 보유하고, [[김정수]] 건설그룹 회장 일가는 건설 및 중공업 계열 지분을 정리하였다.


재계 일각에서는 이 과정에서 형제의 난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장남 [[김정한]]의 해임 이후 막내였던 김정우가 그룹을 승계한 것에 대해 [[김정수]]는 큰 불만을 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당시 김정우 회장이 나누어 가지자고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정수]]가 이를 거부하였고 결국 이후에 건설 및 중공업 부문을 내어주었다고 한다. 이로써 3남 [[김정수]]는 독립된 한민건설그룹의 초대 호장으로 자리잡았고, 김정우는 한민그룹 회장의 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재계 일각에서는 이 과정에서 형제의 난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장남 [[김정한]]의 해임 이후 막내였던 김정우가 그룹을 승계한 것에 대해 [[김정수]]는 큰 불만을 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당시 김정우 회장이 나누어 가지자고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정수]]가 이를 거부하였고 결국 이후에 건설 및 중공업 부문을 내어주었다고 한다. 이로써 3남 [[김정수]]는 독립된 한민건설그룹의 초대 회장으로 자리잡았고, 김정우는 한민그룹 회장의 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2001년 10월, [[KM전자|한민전자]] 내에 이동통신기기사업부가 신설되면서 통신기기 시장에 진출하였다.
2001년 10월, [[KM전자|한민전자]] 내에 이동통신기기사업부가 신설되면서 통신기기 시장에 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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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15일, 아들인 [[김태연]] 회장이 박근혜 정부 광복절 특별사면에 포함되어 출소하였고, 10월 1일 [[KM물산]]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제3대 회장의 취임하였다.
2014년 8월 15일, 아들인 [[김태연]] 회장이 박근혜 정부 광복절 특별사면에 포함되어 출소하였고, 10월 1일 [[KM물산]]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제3대 회장의 취임하였다.
=== 사망 ===
=== 사망 ===
2014년 12월 9일, 김정우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인 '천추각'에서 심혈관계 합병증으로 인해 별세하였다. 향년 71세.
2014년 12월 9일, 김정우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인 '천추각'에서 심혈관계 합병증으로 인해 별세하였다. 향년 71세.

2025년 11월 18일 (화) 02:12 기준 최신판

KM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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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선우
(1954 ~ 1977)
회장 직무 대행
김정한
(1977 ~ 1979)
제2대
김정우
(1979 ~ 2014)
제3대
김태연
(2014 ~ )

KM그룹 2대 회장
김정우
金正友 | Kim Jeong-woo
출생 1943년 5월 17일
경기도 수원군
(現 경기도 수원시)
사망 2014년 12월 9일 (향년 71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천추각
국적 대한민국_국기.svg 대한민국
본관 김해 김씨
학력 매산국민학교 (졸업)
수원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상학부 (상학 / 학사)
[ 펼치기 · 접기 ]
부모 아버지 김선우, 어머니 이해린
형제자매 김정한, 김정성, 김정수
여동생 김자영, 김자순
배우자 김보라
자녀 장남 김태연
차남 김태영
장녀 김한서
장지 경기도 수원시 건산 선산
경력 한성유통 물류부장 (1968~1970)
한민그룹 사장(1970~1979)
한민그룹 회장 (1979~2014)
병역 공군 중위 전역 (사후 44기)

개요

KM그룹의 2대 회장. 현재의 KM그룹의 기틀을 잡은 인물로 평가된다.

생애

유년~청년기 시절

1943년 5월 17일, 경기도 수원군(현 수원시)에서 창업주 김선우와 이해린 사이의 막내로 태어났다. 장남 김정한이 재무와 숫자에 강점을 보였다면, 김정우는 어릴 때부터 사람·현장·물류에 밝았다고 회고된다.

매산국민학교, 수원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거치며 성적은 상위권이었으나,"시험공부보다 장부 보는 게 더 재미있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고등학교 시절 이미 아버지 회사를 드나들며 트럭 배차표, 재고 장부, 외상장부를 구경하곤 했다고.

와세다대학 상학부 유학 시절에는 일본 대기업의 재벌식 경영과 전자 산업의 초기 성장 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와세다 재학 중 휴학을 내고 일본 상사 회사 창고에서 6개월간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때의 경험이 훗날 ""현장은 책상 이긴다"는 그의 신념으로 이어졌다는 평가가 많다.

한성유통 입사

귀국 후 1966년, 공군 중위로[1]복무를 마친 뒤 1968년 한성유통 물류부장으로 입사하며 처음으로 경영 실무에 참여했다.

입사 초기에 그는 수도권·충청권 도매상 및 소매상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거래 조건을 다시 쓰게 만든 인물로 유명하다. 그가 취임한 뒤 한성유통의 재고 회전율과 회수 기간이 대폭 개선되었고, 아버지 김선우는 ""정우는 머리보다 발로 돈을 벌 줄 아는 놈"이라며 물류·현장 관련 권한을 크게 위임했다는 일화가 있다.

1970년 김선우 회장이 고지혈증 진단을 받자, 한성유통 물류부장에서 그룹 사장으로 전격 승진한다. 형 김정한이 재무와 본사 경영을 맡고, 김정우는 계열사와 현장을 돌며 이원화 경영 체제를 구축했다.

형제의 난

김선우 회장 사망 이후인 1977년 1월 19일, 한민그룹 긴급 이사회가 개최된다. 유언장은 없었지만, 김선우는 생전 비서실장 조항락에게 "네가 보기에도 경영 잘할 놈에게 맡겨라. 그래도 정한이가 장남이니 먼저 생각해 봐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이사회는 장남 김정한 부회장을 만장일치로 회장 직무대행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김정한은 유흥과 재테크에만 관심을 보였고, 그룹 경영과 현장에는 무관심했다. 반면 김정우는 현장을 직접 뛰며 계열사 임직원들에게 신망을 쌓고 있었고, 그룹 경영권에 대한 의지도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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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그룹 회장 시절

1979년 7월 3일, 김정우는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전 직원을 본사로 소집하여 취임 연설을 진행하였다. 그는 연설에서 "내실과 신뢰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하며, 회사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직원과 국민 모두의 것임을 강조하였다.

1980년에 들어서자 그는 그룹의 경영 기조를 확장이 아닌 내실화에 두겠다고 선포하였다.

1980년 1월 1일에는 유통 부문의 숙원 사업이었던 한민백화점 강북점(2호점)을 개점하였고, 4월 1일에는 아버지 김선우가 설립한 한민기계를 한민전자에 흡수합병시켰다. 당시 한민전자는 삼성과 금성사에 비해 규모가 작았으며, 합병은 경쟁력 강화를 위한 조치였다.

1983년에는 한민건설이 중동 건설 수주에 성공하여 해외 시장에 진출하였다.

1984년에는 한민관광호텔 2호점을 제주도에 개관하였으며, 1985년에는 한민전자가 소형 가전 사업부를 신설하였다.

1986년에는 반도체 산업이 전 세계적으로 성장하자, 김정우는 그룹의 미래가 반도체와 금융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한민연구소 내에 반도체 및 정보통신 관련 조사팀을 설치하여 사업 진출의 타당성을 검토하였다.

1987년에는 한민건설이 호남고속도로 고서 분기점–서광주 나들목 구간 4차로 확장 공사를 수주하였고, 해당 구간은 1989년에 착공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로 인한 특수 효과로 한민관광호텔한민백화점의 매출이 크게 증가하였다. 또한 3저 호황으로 국내 소비가 확대되면서 대형 가전제품 수요가 급증하자, 한민전자는 대형 가전 사업에도 진출하였다.

1989년에는 수도권 인구 과밀화 해소를 위한 제2기 지하철 건설 계획이 추진되던 가운데, 한민건설이 서울 지하철 4호선 당고개–상계 구간 공사를 수주하였다.

같은 해 한민전자는 산하에 반도체사업부를 신설하며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내 임원 15명 전원이 반대했으나, 김정우는 "손해가 나더라도 양산에 성공하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1990년에는 64K SRAM 시제품 개발에 성공하며 본격적인 반도체 사업에 착수하였다. 또한 동년 서비스 및 교육 사업을 확대하라는 김정우 회장의 지시로 한민관광호텔 3호점인 설악점을 개점하였으며, 경기도 수원시 김선우 회장의 생가였던 매탄동의 사립대학인 한민대학교를 설립하였다.

1991년에는 한민대학교병원을 개관하여 의료 및 교육 복합 단지를 수원시 매탄동의 구축하였고, 동시에 중공업 부문에도 진출하여 한민중공업을 설립하였다.

1993년에는 유통 부문 확장의 일환으로 한민백화점 판교점을 개점하였으며, 1994년에는 한민대학교 사법대학부속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에 설치하였다.

또한 같은 해 기존 한민관광호텔 청량점, 제주점, 설악점을 전면 리뉴얼하여 한민리조트 브랜드로 전환, 호텔 사업에서 리조트 사업까지 유통 사업을 확장시켰다.

1995년, 여신전문금융업을 진출하기 위해 한민캐피탈을 설립하였다. 또한 1996년에는 프리미엄 호텔인 한민호텔 1호점을 서울 강남에 개관하여 고급 호텔 시장에도 진출하였다.

1997년 말, IMF 외환위기 당시 한민그룹은 급격한 환율 상승과 외화부채 상환 압박에 직면하였다. 김정우 회장은 취임 이후 처음으로 그룹 전체에 경영비상체제를 선포하고, 현금 흐름 관리와 투자 축소를 통해 유동성 방어에 나섰다. 신규 설비투자는 전면 중단되었고, 외화 차입금은 채권단 협상을 통해 만기가 연장되었다. 동시에 환위험 관리 체계를 도입하여 선도환 계약 등으로 수출입 변동성을 최소화하였다.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그룹은 유상증자와 회사채 발행을 단행했으며, 자산유동화증권(ABS)을 활용해 단기 자금 압박을 완화하였다. 비핵심 부동산과 유휴 자산은 매각했으나, 한민건설과 한민중공업 등 전략 부문은 유지하였다. 유통·카드·리조트 부문은 멤버십·마일리지 제도를 통합하여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확보했다.

1998년에는 닷컴 열풍이 불어와 인터넷과 정보통신 산업이 급격히 성장하자, 그룹은 한민벤처투자를 설립하여 IT·인터넷 기업 투자에 나섰따 이는 당시 재계 전반에 걸친 벤처투자붐에 발맞춘 전략이었다.

199년,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자금난을 겪던 현대전자는 TFT-LCD 사업부 매각을 추진하였다. 김정우 회장은 이를 인수하여 그룹 전자 계열로 편입시켜 2000년 1월 한민디스플레이를 설립하였다. 이는 기존 가전 및 반도체 사업과의 시너지를 염두에 둔 결정으로, 한민그룹은 디스플레이·반도체·가전의 전자 3대 축을 확보하게 되었다.

2000년에는 IMF 외환위기로 인해 채권 추심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한민신용정보를 설립하며 채권 관리·추심 대행업에 진출하였다. 또한 그룹 내 흩어져 있던 연구 조직을 모두 통합하여 한민경제연구소를 출범시켰고, 임직원 교육과 인재 양성을 위해 한민인재개발연구원을 설립하였다.

2001년, 한민그룹은 IMF 외환위기 이후 선택과 집중 경영 전략의 일환으로 건설 및 중공업 부문을 별도 그룹으로 분리하였다. 당시 그룹은 유통, 금융, 전자 계열의 자원을 집중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설비 투자와 경기 변동성이 큰 건설·중공업 부문을 계열에서 떼어내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2001년 7월, 한민건설과 한민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한민건설그룹이 출범하였으며, 경영은 창업주 김선우의 3남이자 김정우 회장의 형인 김정수 당시 한민건설 부회장이 맡게 되었다.

분리 과정은 지분 정리를 통해 이뤄졌는데, 김정우 회장 일가는 금융, 전자, 유통 계열사의 지분을 보유하고, 김정수 건설그룹 회장 일가는 건설 및 중공업 계열 지분을 정리하였다.

재계 일각에서는 이 과정에서 형제의 난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장남 김정한의 해임 이후 막내였던 김정우가 그룹을 승계한 것에 대해 김정수는 큰 불만을 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당시 김정우 회장이 나누어 가지자고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정수가 이를 거부하였고 결국 이후에 건설 및 중공업 부문을 내어주었다고 한다. 이로써 3남 김정수는 독립된 한민건설그룹의 초대 회장으로 자리잡았고, 김정우는 한민그룹 회장의 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2001년 10월, 한민전자 내에 이동통신기기사업부가 신설되면서 통신기기 시장에 진출하였다.

2003년는 반도체 사업 강화를 위해 한민전자 반도체종합사업부를 물적분할하여 한민반도체를 출범시켰으며, 같은 해 모바일 사업 확장을 목적으로 한민모바일을 설립하였다.

2004년에는 보험업 다각화를 위해 한민손해보험을 설립하였으며, 같은 해 그룹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사명을 KM그룹으로 변경하고 모든 계열사의 명칭을 KM 브랜드로 통일하였다.

2005년에는 면세점 사업부인 KM면세점, 홈쇼핑 계열사인 KM홈쇼핑을 설립하였으며, KM백화점 의정부점과 해운대점을 신규 개관하였다.

2006년에는 KM증권에서 자산운용부문, 선물투자부문, 부동산리츠부문을 분할하여 KM자산운용을 설립하였다.

2007년, KM백화점 광주점과 청주점이 잇따라 개관하였다.

2008년에는 보도전문채널 KBN의 지분을 전량 인수하여 KM그룹의 미디어 산업에 본격 진출하였다.

2009년, KM반도체에서 파운드리 사업부를 물적 분할하여 KM파운드리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일본 도쿄일렉트론과 합작하여 KM반도체(51%)와 도쿄일렉트론(49%)이 지분을 보유한 합작사 KM일렉트론쎄미켐을 출범시켰다.

2010년, 계속된 모바일 사업의 적자로 인해 효율화를 위해 KM모바일을 KM전자로 재편입하였다.

2011년, KM호텔 2호점인 센텀시티점을 개관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2011년 6월 11일, KM 경영권 불법 승계 사건으로 인해 징역 3년이 선고되면서 김정우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명예회장으로 전환되었다. 이어 7월에는 KM물산 이사회를 통해 공동경영체제가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약 1년만인, 2012년 4월 13일 건강 악화를 이유로 이명박 정부로부터 특별사면을 받아 형 집행을 면제받았다.

이후 명예회장직으로 전환되었지만, 아직도 그룹에 파워는 막강했다. 2013년, KM반도체의 반도체 디자인하우스 사업부를 물적 분할하여 KM디자인을 설립하고, 반도체 웨이퍼 제조 전문 기업인 KM실리콘을 신설하였다, 두 회사 모두 공동경영체제 하에서 출범한 계열사였으나, 실제로는 김정우 명예회장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4년 8월 15일, 아들인 김태연 회장이 박근혜 정부 광복절 특별사면에 포함되어 출소하였고, 10월 1일 KM물산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제3대 회장의 취임하였다.

사망

2014년 12월 9일, 김정우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인 '천추각'에서 심혈관계 합병증으로 인해 별세하였다. 향년 71세.

그는 2010년대에 들어 만성 심부전과 당뇨 합병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2012년 특별사면 당시에도 이와 같은 이유였다.

장례는 KM그룹 및 유족 측이 그룹장과 가족장 형식을 병행하여 치렀으며,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빈소가 마련되었다. 정·재계 주요 인사들과 임직원, 전·현직 정치권 인사들이 조문에 참여하여 조용하면서도 대규모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장지는 아버지인 김선우 회장이 있는 고향 경기도 수원 생가로 정해졌다.

어록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한민의 길을 열어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과 혼란 속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위기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의 시작입니다.
첫째, 우리는 내실과 신뢰를 회복해야 합니다. 회사는 일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과 고객, 그리고 나라의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새로운 산업에 도전해야 합니다. 한국 경제는 유통과 건설만으로는 세계와 경쟁할 수 없습니다. 전자, 금융, 그리고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길에서 미래를 찾아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젊은이들을 위한 기업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맡은 책임은 단지 회사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일할 기회를 주고, 가정을 지키게 하며,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저는 약속드립니다. 한민그룹은 더 이상 과거의 그림자에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투명하고 강한 기업,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기업으로 반드시 바꾸어 내겠습니다.
여러분, 저와 함께 다시 시작합시다."

1979년 7월 3일 김정우 회장 취임연설 中

“남이 가지 않은 길에 답이 있다. 따라가는 기업은 영원히 2등에 머문다."

1989년 반도체 산업 진출 당시 내부 회의에서

“실패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두려워하지 말고 뛰어드십시오."

2004년 그룹 창립 50주년 기념 그룹명 변경 선포식 中

  1. 공식 프로필상으로는 '공군 중위 전역'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육군 계엄사령부 헌병지원대 배속이었다는 증언도 있어 논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