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우

신사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1월 4일 (토) 01:02 판 (→‎중공업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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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

三友 | Samoo
국가 대한민국 (다국적 기업)
창립일 1916년 10월 20일
창업주 박승배
회장 박태민
본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대로
규모 대기업
사업분야 화학, 생활용품, 산업기계, 반도체, 금융, 유통, 미디어
링크 | | |

특징

역사

종로의 터줏대감

조선시대부터 종로는 육의전을 중심으로 길가에 시전행랑들이 늘어선 상업의 중심지였다. 그 한복판인 종각 맞은편에는 중국산 비단을 취급하던 선전이 있었는데, 한때는 육의전 중 최고라고 불렸던 선전은 임오군란 후 중국인 상인들이 서울에 들어와 직접 물건을 팔면서 직구족들에 밀려 망하게 되었다. 1916년 이 자리에 박승배 창업주가 '경성상회'를 차린 것이 그룹의 시초이다.

설립 당시에는 포목점으로 시작했으며, 조선 내에서 생산되는 포목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 생산되던 고가의 수입산 포목부터 양품 잡화까지 취급하게 된다. 박승배는 당시 일본인 상점에서 경험을 쌓은 한국인 점원을 고용하여 상점의 확장을 시도하였다. 당시 한국인 상점들은 제조 공장에서 직접 상품을 수입하지 못하고 서울의 일본 도매상에게 상품을 공급받아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상인들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박승배는 경험이 많은 점원을 오사카에 보내 상주토록 하고 일본 공장 제품을 직수입하였다.

이렇게 박승배의 경성상회는 좋은 상품을 값싸게 판매한다는 소문이 시중에 퍼지면서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력인 포목 외에도 귀금속 등 여러 잡화를 취급하며 사실상 준 백화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1931년에는 경성상회를 주식회사화하고 종로에 6층 건물이 신축되자 이 건물을 전세로 얻어 경성백화점을 개점하게 된다.

제조업으로의 확장

경성백화점은 일본에서 화장품을 수입하면서 주요 단골들에게 제공했는데 이게 반응이 좋자 화장품 생산에까지 사업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934년, 박승배는 서소문에 한국 최초의 서양식 조제 약국인 삼우약품을 설립하고 화장품과 의약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때 일본 제약회사들과의 경쟁으로 일제로부터 세금 탄압을 받기도 했다.

1940년 박승배 창업주가 사망하고 장남인 박재철이 가업을 이어받게 된다. 박재철은 아버지의 화장품과 의약품 제조업을 이어 받으면서 플라스틱에 대한 이해만 높이면 칫솔, 빗 등의 일상 생활용품을 만들 수 있음을 깨닫고 본격적인 제조업으로의 진출을 위해 1942년 삼우화학을 세워 플라스틱과 생활용품 제조업에 진출하게 된다.

미군정 말기인 1947년, 박재철은 사세 확장을 위해 인천에서 가장 큰 건자재 가게였던 '대성상회'를 인수하여 삼우건설을 설립한다. 그리고 얼마 안가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미군 관련 공사와 전후복구 사업에 힘입어 성장하게 된다. 이후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 따른 특수로 급성장하기 시작했으며, 1970년대 중동 진출로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1950년대 해외 원조 등으로 전후복구사업이 진행되면서 50년대 후반에는 전기통신이 대부분 복구되었다. 이 시기에 박재철은 민간방송의 출현과 라디오에 관심을 두었다. 라디오의 수요는 늘어나고 있었지만 전부 외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삼우화학이 가지고 있던 플라스틱 가공 경험과 금형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여 1958년 삼우전자를 설립한다. 이듬해 국내 최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 생산을 시작으로 1960년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제휴를 맺으면서 가전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중공업 진출

1967년 정부가 제2정유공장 설립을 계획함에 따라 삼우화학이 한국화약 등 여러 경쟁사들을 제치고 영국 로열 더치 쉘과 합작해 삼우정유를 세웠다. 그러나 1973년과 1979년에 두 차례 터진 오일쇼크의 유탄을 맞은 쉘 사가 1980년에 소유 지분 50%를 모두 삼우그룹에게 넘겨버렸고 이후 삼우그룹 측이 단독경영을 맡게 된다.

1968년 정부의 중공업 육성계획에 따라 한일국교정상화로 얻어낸 자본으로 삼우중공업을 설립했다. 이후 1970년대 경제성장 및 수출 호조에 따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정부 주도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힘입어 단기간에 국내 최대기업으로서 성장했다.

1970년에 기획조정실을 신설해 그룹의 형태를 갖추었고, 1971년 박재철 회장이 사망하고 삼남인 박진봉이 가업을 이어받아 태평증권을 인수해 금융업에도 손을 뻗었다. 이후 전자사업 확장을 개시하며 동양반도체를 인수해 반도체산업에 진출하고, 1974년에는 동화신문을 인수해 언론사업에도 진출하는 등 순조롭게 그룹을 확장시키며 삼우그룹은 60~70년대에 재계 1위의 자리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