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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M그룹 2대 회장 김정우 金正宇 | Kim Jeong-wo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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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43년 5월 17일 |
| 경기도 수원군 (現 경기도 수원시) | |
| 사망 | 2014년 12월 9일 (향년 71세) |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천추각 | |
| 국적 | |
| 본관 | 김해 김씨 |
| 학력 | 매산국민학교 (졸업) 수원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상학부 (상학 / 학사) |
| 부모 | 아버지 김선우, 어머니 이해린 |
| 형제자매 | 3남 2녀 중 삼남 |
| 배우자 | 김보라 |
| 자녀 | 장남 김태연 차남 김태영 장녀 김한서 |
| 경력 | 한성유통 물류부장 (1968~1970) 한민그룹 사장(1970~1979) 한민그룹 회장 (1979~2014) |
개요
KM그룹의 2대 회장. 현재의 KM그룹의 기틀을 잡은 인물로 평가된다.
생애
1943년 김선우 회장이 제방상회 사원으로 재직 중에 셋째로 태어났다.
유년~청년기 시절
1943년 5월 17일, 경기도 수원군(현 수원시)에서 창업주 김선우와 이해린 사이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막내"였으나, 일찍이부터 형들과 다른 기질을 보였다. 장남 김정한이 재무에 강점을 두었다면, 김정우는 실무와 물류의 강점이 있었다.
수원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에서 유학하며 당시 일본 대기업들의 재벌식 경영·전자산업 성장 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이 경험은 훗날 그의 공격적 사업 확장의 배경이 된다.
한성유통 입사
귀국 후 1968년, 한성유통의 물류부장으로 입사하며 처음 경영에 뛰어들었다. 초기에는 유학한 지식을 바탕으로 현장과 물류로 총괄했다.
이후 김선우 회장이 1970년 고지혈증을 진단받자 한성유통 물류부장에서 그룹 사장으로 승진시킨다. 형 김정한은 재무와 본사를 맏고 김정우는 현장을 돌아다니며 이원화 경영 체제를 이끌며 본격적으로 경영 전면에 등장했다.
형제의 난
김선우 회장의 사망 이후, 1977년 1월 19일 한민그룹 긴급 이사회가 개최된다, 당시 유언으로 남긴건 없었지만 김선우 회장은 조항락 비서실장에게 "너가 경영을 잘할거 같은 놈으로 물려줘라, 그래도 정한이가 더 나은 것 같다"라는 말을 남겼다.
긴급 이사회의 만장일치로 김정한 부회장이 그룹 회장 대행을 맡게된다. 하지만 김정한 부회장은 유흥을 좋아했고 그룹 경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또한 돈을 만지는 것만 관심이 있었지 현장 상황은 아무것도 몰랐다. 반면 김정우 사장은 현장을 돌아다니며 실무에서 직원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고, 그룹 경영의 야망이 있었다.
1977년 김정한은 회장 대행에 취임하자마자 무작정으로 회사 예산을 모두 감축하고 긴축 경영 체제에 들어간다, 당시 한국은 박정희 정부로 인해 고도의 성장기 시기였고 특히 건설사에 투자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특히 김정한은 한민건설 사장을 불러 무작정 삭감을 지시했고 결국 다음 수주를 따내는데 실패하게 된다, 이때 김정우 사장은 바로 형에게 달려가 화를 내며 당장 원상복구하라고 말을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30여년 뒤 당시 한민건설 사장에 증언에 의하면 김정한은 건설사 예산을 삭감하여 그 돈으로 정치계 로비와 본인의 비자금을 마련할려고 했다고 말했다.
1977년 10월, 김정한은 외국계 투자은행장에 유혹에 넘어가 그룹의 막대한 규모의 자본을 단기 고수익 외화 회사채에 투자하게된다, 당시 그룹 경영실에서 극구만류했지만 김정한은 경영실장을 해임하면서까지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투자를 했던 회사가 파산하게 되면서 결국 김정한은 회삿돈 당시 100만달러 규모(현재 가치로 약 600만달러)를 잃게 된다, 그룹은 언론에 로비를 하며 이 사건을 외부로 퍼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결국 언론에 보도가 되었고 결국 회사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후 김정한은 이 사안에 대해 "시장 리스크였지 내 책임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했고 김정한 리더십이 흔들리게 된다.
1978년에 김정한은 회사를 장악하기 위해 아버지 김선우 회장과 처음부터 일해오던 계열사 사장 및 임원 7명을 강제 전보 조치 및 해임 조치를 하고 그 자리에 본인의 사람을 앉히게 된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물류부문 임원이었던 주현인[1]이 김정한이 계열사 간 자금 순환을 이용하여 회사채 투자 사건의 손실을 매꾸고 본인의 비자금을 마련할려고 했다고 언론에 폭로했다.
1979년에는 정계 로비를 통해 한민관광호텔 청량 인근 부지를 값싸게 매입하고 그 자리에 로비를 통해 공공사업 부지로 선정하고 한민건설이 수주하기로 했지만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다. 결국 1979년 7월 3일, 이사회 안건으로 김정한 회장의 부회장직 및 회장 대행 해임건이 올라왔고 찬성 11표, 반대 2표로 결국 해임되고 며칠 뒤 김정우 사장이 그룹 회장직에 선임되는 안건이 올라오자 만장일치로 회장으로 추대 되었다.
3년간 이어진 형제 간 권력 투쟁은 결국 막내 김정우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형인 김정한은 미국 LA로 출국하여 결국 사망 전까지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
한민그룹 회장 시절
1979년 7월 3일, 김정우는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전 직원을 본사로 소집하여 취임 연설을 진행하였다.
그는 연설에서 "내실과 신뢰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하며, 회사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직원과 국민 모두의 것임을 강조하였다.
1980년에 들어서자 그는 그룹의 경영 기조를 확장이 아닌 내실화에 두겠다고 선포하였다.
1980년 1월 1일에는 유통 부문의 숙원 사업이었던 한민백화점 강북점(2호점)을 개점하였고, 4월 1일에는 아버지 김선우가 설립한 한민기계를 한민전자에 흡수합병시켰다.
당시 한민전자는 삼성과 금성사에 비해 규모가 작았으며, 합병은 경쟁력 강화를 위한 조치였다.
1983년에는 한민건설이 중동 건설 수주에 성공하여 해외 시장에 진출하였다.
1984년에는 한민관광호텔 2호점을 제주도에 개관하였으며, 1985년에는 한민전자가 소형 가전 사업부를 신설하였다.
1986년에는 반도체 산업이 전 세계적으로 성장하자, 김정우는 그룹의 미래가 반도체와 금융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한민연구소 내에 반도체 및 정보통신 관련 조사팀을 설치하여 사업 진출의 타당성을 검토하였다.
1987년에는 한민건설이 호남고속도로 고서 분기점–서광주 나들목 구간 4차로 확장 공사를 수주하였고, 해당 구간은 1989년에 착공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로 인한 특수 효과로 한민관광호텔과 한민백화점의 매출이 크게 증가하였다.
또한 3저 호황으로 국내 소비가 확대되면서 대형 가전제품 수요가 급증하자, 한민전자는 대형 가전 사업에도 진출하였다.
1989년에는 수도권 인구 과밀화 해소를 위한 제2기 지하철 건설 계획이 추진되던 가운데, 한민건설이 서울 지하철 4호선 당고개–상계 구간 공사를 수주하였다.
같은 해 한민전자는 산하에 반도체사업부를 신설하며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내 임원 15명 전원이 반대했으나, 김정우는 "손해가 나더라도 양산에 성공하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1990년에는 64K SRAM 시제품 개발에 성공하며 본격적인 반도체 사업에 착수하였다.
어록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한민의 길을 열어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과 혼란 속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위기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의 시작입니다. 첫째, 우리는 내실과 신뢰를 회복해야 합니다. 회사는 일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과 고객, 그리고 나라의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새로운 산업에 도전해야 합니다. 한국 경제는 유통과 건설만으로는 세계와 경쟁할 수 없습니다. 전자, 금융, 그리고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길에서 미래를 찾아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젊은이들을 위한 기업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맡은 책임은 단지 회사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일할 기회를 주고, 가정을 지키게 하며,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저는 약속드립니다. 한민그룹은 더 이상 과거의 그림자에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투명하고 강한 기업,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기업으로 반드시 바꾸어 내겠습니다. 여러분, 저와 함께 다시 시작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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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7월 3일 김정우 회장 취임연설 中 |
“남이 가지 않은 길에 답이 있다. 따라가는 기업은 영원히 2등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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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반도체 산업 진출 당시 내부 회의에서 |
“실패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두려워하지 말고 뛰어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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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그룹 창립 50주년 기념 그룹명 변경 선포식 中 |
- ↑ 김선우의 오른팔이라고도 불렸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