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M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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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선우
(1954 ~ 1977)
회장 직무 대행
김정한
(1977 ~ 1979)
제2대
김정우
(1979 ~ 2014)
제3대
김태연
(2014 ~ )

KM그룹 창업주
김선우
金善宇 | Kim Seon-woo
출생 1920년 3월 13일
경기도 수원군
(現 경기도 수원시)
사망 1977년 1월 14일 (향년 57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천추각
국적 대한민국_국기.svg 대한민국
본관 김해 김씨
건산(建山)
학력 수원거류민소학교 졸업
수원고등농림학교 졸업
부모 아버지 김준봉, 어머니 이태순
형제자매 5남 4녀 중 장남
배우자 이해린
자녀 장남 김정한
차남 김정성
삼남 김정우
장녀 김자영
차녀 김자순
경력 제방상회 배달원(1941~1945)
제방상회 부사장(1945~1954)
한성유통[1] 사장(1954~1977)
한민그룹 회장(1962~1977)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KM 창업주.

생애

유년~청년기 시절

김선우 초대 회장은 1920년 3월 13일, 경기도 수원군 매탄리(현 수원시 매탄동)에서 태어났다. 대지주였던 김준봉의 5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매탄리 일대의 대부분 토지를 소유했던 부친의 덕분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 김준봉은 그를 농사꾼으로 키우고자 했으나, 김선우는 일찍이 상업과 기계에 대한 관심을 품고 있었고, 이로 인해 부친과의 갈등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길을 고집하며 현실을 뚫고 나아가기 시작한다.

1941년, 김선우는 21세의 나이로 당시 지역에서 규모가 컸던 제방상회에 배달원으로 취업했다. 그는 성실한 태도와 뛰어난 눈썰미로 빠르게 사내의 주목을 받았고, 결국 1945년, 제방상회 사장 이복래의 신임을 얻어 회사 임원으로 승진하게 된다.

이때는 마침 해방을 맞이한 시기였고, 나라가 새로운 질서를 준비하던 시점이었다. 김선우는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상업과 유통이 새로운 미래임을 감지했다. 이후 이복래 사장에 신임을 받으며 계속해서 승진을 거듭하며 제방상회를 성장시켜가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김선우는 평소처럼 출근하여 제방상회를 오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북한군의 남침 소식은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시장은 혼란에 빠졌고, 사람들은 제방상회로 들이닥쳐 곡물이며 비누 한 장이라도 더 쥐려는 눈빛으로 가게를 헤집었다.

이때, 김선우는 2층에 있던 이복래 사장을 깨우고 2층 금고에서 모든 돈과 문서를 가지고 이복래 사장에게 본인에 가족과 함께 피난을 가라고 했고, 본인은 계속 제방상회에 남아 가게를 지키겠다고 했다. 훗날 이때 이복래 사장이 이 모습에 감동하여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싼 가격에 김선우에게 가게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며칠 뒤,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수원은 곧 전선이 되어버렸고, 군인들과 피난민들이 끝없이 밀려왔다. 김선우는 이때도 매일 밤 창고 앞에서 가게 문을 지켰다. 그러나 전쟁은 상점을 지키겠다는 의지 하나로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달 뒤, 군 작전으로 수원 전역이 강제 철수 지역으로 지정되었고, 결국 제방상회도 문을 닫게 되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대전-보은-함양을 거쳐 부산까지 가는 피난길에 올라야만 했다.

부산에서도 김선우는 물자 교환, 생필품 조달 등 생존에 필요한 실용 감각을 발휘했다. 특히 미군 부대와의 접촉을 통해 남은 군수물자를 들여와 주민들과 나누는 일을 도맡으며, 자연스럽게 물자의 흐름에 대한 감각을 쌓아갔다.

한성유통 사장 시절

1954년 한국전쟁의 종전 직후, 김선우는 고향 수원으로 돌아온다. 전쟁으로 인해 제방상회는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전후 복구와 함께 외국에서 수입되는 각종 물자가 쏟아지던 시기, 그는 외국 물품의 유통에 가능성을 발견한다. 셈이 빨랐던 김선우는 가게를 인수하여 본인이 직접 운영하고자 생각했고 아버지에게 찾아가 당시 돈으로 40만환을 빌렸다. 이후 이복래 제방상회 사장을 찾아간 김선우는 제방상회를 25만환에 인수하겠다고 했고, 이복래 사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장남과 차남에 이름을 따와 한성유통으로 이름을 바꾸어 1954년 7월, 수원군 매탄리에서 한성유통을 개업한다. 이것이 훗날 KM그룹의 시초이다.

휴전 직후 남한 전역에는 미군의 잔여 물자, UN 구호품, 일본 및 홍콩발 소비재가 쏟아져 들어왔다. 당시 대부분의 상인들은 무분별하게 물자를 받는 족족 팔아치웠지만, 김선우는 어느 지역에 어느 물품이 필요한지 매일 노트에 정리하며 공급망과 수요를 정확히 읽었다. 그는 비누, 담배, 구호쌀, 면직물 등의 생필품은 일괄 수입하여 도 단위로 재분배하였 미군 PX 잉여물자는 전쟁 당시 부산에서 미군과 접촉했던 방식과 인맥을 활용하여 중간 도매 없이 확보했다. 또한 지방 소도시 상점들과 직접 찾아다니며 유통 계약을 맺고 소형 도시 간 유통망 네트워크를 구성했다.

1956년 4월, 그는 수원-인천-대전을 잇는 첫 물류 루트를 지인 이성태에 의해 처음 구축하게 된다. 그는 미군기지에서 미군 5톤 트럭 1대를 중고로 구매하고 운전사 2명을 직접 고용하여 도로를 달리며 전국을 누볐다. 이때에도 김선우는 운전사만 보내는 것이 아닌 본인이 직접 조수석에 타 함께 다니며 물류 시간표를 손수 기록했다.

1958년이 되면 서울, 대전, 대구, 광주에도 도매 파트너를 확보한 그는 대전에 땅을 사들여 한성유통1창고, 한성유통2창고를 세우며 지방 상권의 허브로 성장해나간다. 이때부터 김선우의 한성유통은 지방의 소매상이 아닌 전국의 유통가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1959년, 이때부터 자녀들도 경영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장남 김정한에게 한성유통 수원본사 회계과장 자리를 준 김선우는 장남에게 한성유통 수원본사 경영을 맡기기 시작한다. 당시 20살이던 김정한은 삼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하나도 몰랐던 그에게 회계과장 자리를 물려준 것은 도박에 가까웠다. 그리고 김정한은 아버지에게 "시장도 다녀본적이 없고 회사도 운영할 줄 모릅니다"라고 하자 김선우는 "직접 부딪히면서 처음부터 배워라, 하면 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정한은 의외로 회계과장 일을 잘 소화해냈고 심지어 수익 흐름과 비용 구조를 정밀하게 분석하여 아버지에게 매일 밤 찾아가 회사에 수익을 망치는 것을 사실대로 말해주었고, 또한 돈을 줄여도 될 곳도 거짓없이 말해주었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1960년 3월, 21살이 된 김정한에게 한성유통 중부권 사업부에 부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김정한은 중부권 사업부장 자리를 잡자마자 대전, 청주, 옥천 등의 재고 관리, 물류 계약, 지방 수금 및 재납품까지 도맡게 된다.

1960년에 한성유통은 전국 지부 15개, 수익 12배 성장, 전국 8개 주요 도시 거래 호가보, 직원 80명 돌파라는 성과를 달성하며 기존 수원을 넘어 영남과 충청의 유통 허브의 1인자가 된다.

한민으로 그룹명을 변경하다

1962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으로 인해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던 시점, 김선우 회장은 사업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다. 1962년 2월, 유통 사업을 하며 친해진 미군 리처드 도슨 소령의 추천으로 미국에서 낡은 기계들을 들여오게 된 그는, 이를 직접 수리하여 재판매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한성기계라는 새로운 회사를 만들었다.. 이 회사 성장 과정에서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게 되는데 김선우의 둘째 아들이었던 김정성이 22살의 나이로 병환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김선우는 둘째 아들 김정성을 "조용했지만 따뜻한 아이였다"라고 회고했다. 장례가 끝난 이후 회사 사명을 한성에서 한민으로 변경한다고 발표했다.

“한성(韓成)은 장남 정한이와 둘째 정성이의 이름에서 따왔다.
하지만 정성이가 떠나며 내가 그 이름을 바라볼 때마다…
이제는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유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소.

한성은 가족의 이름이었고, 한민은 국민의 이름이오.
우리가 파는 건 생필품이지만, 우리가 움직이는 건 삶이고 희망이어야 하오.”

1962년 3월 13일, 김선우 사장의 발언

김선우의 선언 이후 한성유통은 한민유통으로, 한성유통창고에서 한민유통창고로, 한성기계에서 한민기계로 사명을 바꾸었고, 이듬해 6월은 모든 계열사를 통합하여 한민그룹을 만들고 김선우 한민유통 사장이 임직원의 만장일치로 회장으로 취임한다.

한민그룹 회장 시절

1962년 6월 1일, 전 임직원의 만장일치로 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먼저 회사에 여러군데로 흩어져 있던 부서를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을 실시한다. 그룹 산하에 영업본부, 물류본부, 구매본부, 회계부, 총무부를 갖추었으며 이 시대에는 특이하게 직원 승진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마련했다.

1963년에는 미군 트럭을 중고로 15대나 소유하고 있었는데, 싼 값에 트럭을 구매했다 보니 고장나기 일쑤였다. 김선우는 이럴 바에는 우리가 고치자고 충격 발언을 한다. 그리고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조항락에게 평소 교류하던 성진정비소의 정비소장이었던 한동성에게 지급 받는 월급에 2배를 주고 사장 자리를 줄테니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또한 계속되는 트럭 대수가 늘어나자 운영 효율을 느낀 김선우는 운송업에도 뛰어들었고, 63년 5월 한민운송과 한민정비를 설립하였고 당시 본사가 있던 수원 화서동에 한민자동차정비사를 세우게 된다.

1965년에는 일본 이토요카도 기업의 본사와 각 매장을 견학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 당시 이토요카도는 미국식 할인점 체인을 서서히 도입 중이었고 김선우 회장도 이것에 흥미를 느낀다. 출국 직후 곧장 영업본부 회의실로 달려간 그는 "한국에도 미국식 할인점 체인이 어울릴까?"를 바로 질문으로 던졌다. 영업본부장을 중심으로 한달간 서울 중구, 수원, 인천, 대전 등지의 전통시장과 구멍가게 등을 돌아다니며 소비자 구매 습관과 생활소득 수즌을 파악하였고, 시장조사 결과는 '50%의 성공 확률'로 계산했다. 저소득층은 흥정을 못하니 손해를 본다는 입장이었지만, 공무원이나 교사 등 중산층은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결국 동년 10월, 한민슈퍼마켓을 만들기로 하고 수원시 매교동에 한민슈퍼마켓 1호점을 내면서 한민슈퍼라는 회사를 만들게 된다.

1966년 초, 김정한 당시 한민그룹 영업본부장이 서울 출장 중 우연히 유통업자에게 청계천 근처에서 지점 하나로 운영되던 작은 보험회사인 '동민상호신용보험'의 매각설을 듣게 된다. 이 회사는 직원 12명의 전국 가입자가 고작 1000여명 남짓이었던 작은 회사였다. 이 사실을 김선우 회장에게 보고하자 김회장은 "물류로는 평생 먹고살 수 없다, 우리도 금융을 해야한다"라고 말했고 즉시 인수를 지시한다.

1965년 5월, 한민그룹은 동민상호신용보험을 인수하고 사명을 한민생명으로 바꾼다. 이는 지금까지 계열사로 전해내려오는 KM생명이다. 초기에는 한민그룹의 자본으로 전국 대도시 지역에 지점을 설치하고 타 보험회사에서 여러 인력들을 영입하여 크기 확장에 주력했다. 특히 한민유통 모든 지점에 한민생명 보험 광고를 내걸고 이곳에서도 보험을 팔게했다.

같은 해 가을, 김선우 회장은 유통 사업 내에 도매업체와 협력점들의 대금 결제가 며칠씩 밀리고 신용 거래 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자 자체 금융 회사가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김선우 회장은 비서실을 통해 투자중개업 면허를 가진 증권 회사를 알아보라고 했고 서울 충무로에서 작은 증권사 1곳이 청산 절차에 들어간다는 소문이 돌자 마자, 김정한 당시 영업본부장이 직접 찾아가 협상을 통해 그 회사를 인수하게 된다. 인수하자마자 사명을 한민증권주식회사로 명칭을 바꾸었고 이는 현재의 KM증권이 된다.

초기에 한민증권주식회사는 증권사가 아닌 한민그룹 계열 내에 도매거래와 소매업자들을 대상으로 상품 결제 금융에 주력했다. 이후 1970년대에 본격적인 증권업무를 시작하며 우리나라의 이름을 알린 증권사로 자리매김한다.

고지혈증을 진단받다

1970년 7월, 그는 유난히 피로를 호소하고 아침 회의 도중에는 쓰러지는 일이 발생하자 비서실의 설득 끝에 서울대병원 VIP 진료 결과 '중등도 고지혈증', 즉 이상지질혈증이었다. 당시로선 비교적 생소한 질병이었지만, 의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처럼 계속 일하시면 심징이나 뇌혈관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선우 회장은 잠시 웃으며 말했다. "이제 물러나야 할 때가 왔구나"

그날 밤, 두 아들 김정한 영업본부장과 김정우 물류부장을 불러 조금씩 경영승계를 시작했고, 다음 날 김정한 영업본부장을 그룹 부회장으로, 김정우 물류부장을 그룹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김선우 회장이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는데 1972년 10월, 청와대 비서실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이 민간 대기업의 전자 산업 참여를 요청했고 김선우 회장은 당시 전자가 트렌드인 것을 인지했고,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생긴 경기도 성남시에 인근 땅을 매입하여 1973년 4월 한민전자를 설립하게 된다, 초기에는 전축, 선풍기와 금성사와 협약을 맺어 냉장고의 일부 부품을 생산하는 식으로 회사를 성장했다.

1974년에는 그룹 내에서 유통 시장을 넘어 도심 소비 문화 공간으로 진출을 계획하고 있었다. 김성한 부회장의 제안으로 기존 유통망을 바탕으로 백화점과 관광호텔을 설립을 제안했고, 1975년 4월에는 한민백화점 수원점, 1975년 10월에는 당시 지하철 1호선의 종점이었던 청량리역 인근에 한민관광호텔 청량을 문을 열었다.

그는 고령의 나이와 계속된 질병으로 몸이 쇠약해졌다, 하지만 매주 그룹 회의에 참석했고 신규 사업 보고서는 매번 회장 결재까지 받아야했다.

1975년에는 정부에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하에 건설부(현 국토부)에서 민간 건설 참여 확대 정책 문건을 보고 김선우 회장은 책상을 탁 치며, 건설업에 진출하겠다고 결심한다. 동년 6월 9일, 한민건설을 설립하고 첫 수주로 충북 청원군(현 청주시 청원구)에 한민물류4센터 신축 공사를 수주로 따냈고, 기존 건설사 대신 한민건설이 직접 시공한다. 그 결과 예산 17% 절감했고 공사기간을 2개월 단축하는 좋은 결과를 얻게된다. 이후 이 성과는 박정희 대통령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공공 프로젝트 수주의 기회를 얻게되었다.

1975년 말, 국방부 산하 조달본부에서 논산훈련소 관사 신축 입찰에 참가한 한민건설은 당시에는 드문 신생 기업으로서 입찰을 성공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6개월만인 1976년 2월, 논산훈련소 관사 2개동 신축사업을 성공적으로 완공하게 되고, 이 프로젝트는 김정우 사장이 이끌어 성공한 첫 프로젝트가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김선우 회장은 김정우 사장에게 처음으로 칭찬을 해주었다고 한다.

  1. 1962년 한민유통으로 사명 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