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펼치기 · 접기 ]
|
삼우 三友 | SAMOO
| |
---|---|
국가 | 대한민국 |
창립일 | 1908년 6월 28일 (116주년) |
창업주 | 신익상 |
회장 | 신동호 |
분야 | 석유화학, 중공업, 반도체, 금융, 유통, 미디어 |
기업 규모 | 대기업 |
소재지 | 삼우본관빌딩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76 (신문로1가)
|
개요
삼우물산을 주축으로 한 대한민국의 기업집단이다.
역사
태동기
창업주 신익상은 상업은행에 근무하면서 거래 상인들과 친교를 맺고 자연스럽게 상업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1919년 상업은행 퇴직 후 자본금 100만원으로 종로에 귀금속, 양품잡화, 화장품, 학용품 등을 취급하는 동화상점(同和商店)이라는 잡화점을 개점한다.
당시 한국인 상점들은 제조 공장에서 직접 상품을 수입하지 못하고 서울의 일본 도매상에게 상품을 공급받아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상인들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신익상은 경험이 많은 점원을 오사카에 보내 상주토록 하고 일본 공장 제품을 직수입하였다. 이렇게 신익상의 동화상점은 좋은 상품을 값싸게 판매한다는 소문이 시중에 퍼지면서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잡화상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이어 1924년에는 경영난에 빠진 '계림상회'를 인수하여 사업을 확장하는 한편 함흥, 대구, 전주, 광주, 나주, 순천, 목포에 지점을 설치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1931년에는 종로에 4층 건물을 전세로 얻어 경성백화점을 개점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첫 번째 백화점이었다. 그러나 경성백화점은 여전히 일본인이 경영하는 미쓰코시나 조지야 백화점에 비해 규모나 자본력에서 열세였을 뿐만 아니라 고객 유치 방법도 뒤떨어졌다.
신익상은 경성백화점을 미쓰코시 백화점 못지않은 현대식 백화점으로 만들기 위하여 점포 내의 진열과 장식에 특히 중점을 두어 개선하였다. 또한 200여 종업원을 모두 일본인 백화점의 종업원에 뒤지지 않게 훈련시켰고, 손님을 대할 때도 친절하게 하도록 교육하였다. 종업원 중 절반을 여성으로 채용한 다음 그들에게 깨끗한 의복을 입혀 손님에게 친절과 봉사를 다 하도록 힘썼다. 이러한 친절과 서비스 정신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경성백화점의 특색은 품질이 좋은 제품을 값싸게 판매한다는 전략이었기 때문에 오사카, 고베 방면의 직수입망을 더욱 튼튼하게 하였다.
1932년에는 만 2년 동안 유지되던 금본위제가 폐지되는 바람에 곧바로 일본에서의 금 수출이 금지되었다. 이 조치로 금은 등 귀금속과 여타 상품의 가격이 치솟았다. 금은을 중심으로 하는 경성백화점은 매장과 창고에 잔뜩 쌓였던 재고품으로 전에 없던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제조업 진출
창업주 신익상은 남들보다 훨씬 앞서 상업계에 진출한 인물이었지만, 일본 오사카 공장에서의 물품 직수입, 상품권 발행, 금전 등록기 설치, 주택을 상품으로 주는 등의 대담한 상행위로 새로운 경영 방법을 구사하는 경쟁사들이 등장하면서 사세가 위축되기 시작했다. 신익상은 새로운 사업을 발굴하던 중 당시 경성백화점이 일제 화장품을 수입하면서 이를 사은품으로 주요 단골들에게 제공했는데 이게 반응이 좋았던 것이 떠오르며 화장품 생산에까지 사업영역을 확대한다.
1935년 조선약품 설립 후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던 미안수를 자가 제조법으로 만들어 판매했고 구리무, 가루분 등으로 화장품 제조의 종류와 폼목을 넓혔다. 가내수공업 화장품이 품질이 우수하다는 입소문을 타 큰 인기를 끌었으나 화장품 용기가 뚜껑이 잘 깨지는 재질이어서 사용이 불편한 문제가 있었다. 당시 국내에는 합성수지가 생산되지 않는 상황이었고, 플라스틱이란 말도 생소한 때라 깨지지 않는 화장품 용기를 만드는 일을 알아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1938년 조선화학공업사를 설립하면서 미국에서 사출성형기 한 대를 도입해 깨지지 않는 화장품 용기를 개발한다.
이때 신익상은 플라스틱에 대한 이해만 높이면 칫솔, 빗 등의 생활용품을 만들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화장품 용기 개발을 계기로 주력사업을 플라스틱으로 바꾸고 1945년 국내 최초의 플라스틱 빗을 출시했다. 가볍고 사용하기 편리하다 보니 시장의 인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먼저 물건을 받으려는 상인들이 연일 장사진을 이루었고, 물건을 싣고 가다 외국산 밀수품으로 오해를 받아 곤욕을 치르는 도매상도 있을 정도였다. 이후 세숫대야, 일반 식기류, 비닐 장판 등 생활용품부터, PVC 파이프, 폴리에틸렌 필름 등 산업용 제품까지 다양한 플라스틱 제품을 시장에 선보이며 플라스틱 가공사업으로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가고 있었다.
성장기
신익상은 장차 건설시장이 점차 커질 것이란 확신으로 1948년 인천의 향토 건설업체인 중앙토건주식회사를 인수하면서 건설업에도 진출한다. 그러나 인수 초기의 경영은 신통치 않았는데, 당시 건설업체들이 난립한데다가 미군정이 종식되면서 미군공사가 중단되고 6.25전쟁이 발발한 탓이었다. 전쟁 중에 신익상은 부산으로 피난, 그곳에서 집단수용소 건설공사를 수주하면서 다시 건설업을 재개했다. 또한 전쟁이 끝난 후 복구공사가 본격화하면서 중앙토건주식회사는 건설특수에 따른 호황을 톡톡히 누렸다.
1951년에는 삼우물산을 부산에 설립하면서 경상도를 중심으로 농산물 등 판매를 주로 하다가 대만, 일본 등지에까지 수출을 해서 무역업에도 진출했다. 당시 한국전쟁 중에 전투지역에 있던 탄피나 기타 버려진 무기들을 일본공장들에 고철로 수출하며 엄청난 영업이익을 내고, 이는 전후에 재벌기업으로 발돋움하는 발판이 되었다. 1954년에는 조선약품과 조선화학공업사를 합병 후 삼우화학으로 재출범한 후, 중앙토건주식회사를 삼우건설산업으로 사명을 바꾼다.
1970년대 경제성장 및 수출 호조에 따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정부 주도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힘입어 단기간에 대기업으로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