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M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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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선우
(1954 ~ 1977)
회장 직무 대행
김정한
(1977 ~ 1979)
제2대
김정우
(1979 ~ 2014)
제3대
김태연
(2014 ~ )

KM그룹 회장 직무 대행
김정한
金正干 | Kim Jeong-han
출생 1939년 8월 1일
경기도 수원군
(現 경기도 수원시)
사망 2025년 3월 7일 (향년 86세)
미국 LA
국적 대한민국_국기.svg 대한민국
본관 김해 김씨
학력 매산국민학교 (졸업)
수원중학교 (졸업)
삼일상업고등학교(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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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김선우, 어머니 이해린
형제자매 동생 김정성, 김정수, 김정우
여동생 김자영, 김자순
배우자 임지연(1965년 결혼 ~ 1985년 사별)한세령(1994년 결혼)
자녀 장남 김태한
차남 김한열
장녀 김한주
경력 한성유통 회계과장(1959~1960)
한성유통 중부권 사업부장(1960~1966)
한민그룹 영업본부장 (1966~1970)
한민그룹 부회장(1970~1979)
한민그룹 회장 대행(1977~1979)

개요

KM그룹 초대회장인 김선우 회장의 장남이자 KM그룹 회장 대행을 역임했다.

김선우 회장 사망 후 그룹을 물려받을 1순위로 여겨졌으나, 무리한 외화 회사채 투자와 정경유착 의획, 계열사 예싼 삭감 등으로 2년 만에 이사회에서 해임되었다.

생애

유년기 ~ 청년 시절

김정한은 1939년 8월 1일 경기도 수원군(現 수원시)에서 태어났다. 지역의 대지주이자 한성유통을 일으킨 김선우와 이해린 사이의 장남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매산국민학교, 수원중학교를 거쳐 삼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문과·이과 과목에는 큰 흥미가 없었으나, 산수와 상업·회계 과목에는 두각을 나타냈다. 담임교사가 생활기록부에 "공부는 게으른 편이나, 숫자를 다루는 감각이 남다름"이라고 적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청소년기 그는 '후계자'라기보다 '장난기 많은 큰아들'에 가까웠다. 수원 장터를 따라다니며 아버지 가게의 장부를 보고 숫자를 흉내 내다가, 잘못 계산해 장부를 망쳐 꾸중을 들은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김선우는 장남을 일본 혹은 미국 유학을 보내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김정한 본인이 "책만 보는 공부는 못 하겠다. 상고에서 배운 걸 바로 써보고 싶다"며 완강히 거부했다. 결국 유학 대신 한성유통 입사가 결정되며, 그는 정식으로 '오너 2세'의 길에 발을 들이게 된다.

한성유통 회계과장·사업부장 시절

1959년, 삼일상업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스무 살의 김정한은 부친의 전격적인 결정으로 한성유통 수원 본사의 회계과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고졸 신입이 회계과장 직함을 달고 온다는 사실은 본사 직원들 사이에서 "낙하산 중에서도 낙하산"이라는 불만을 낳았다.

초기에는 기초 장부 정리, 수금 일정 관리조차 버거워 거래처 이름과 금액을 혼동하는 실수도 잦았다. 그러나 그는 퇴근 후에도 금고 앞 책상에 앉아 장부를 다시 맞추는 일을 반복했고, 이 과정에서 매출·비용·재고 구조를 몸으로 익혀 나갔다.

그는 장부를 단순 기록이 아닌 '흐름을 읽는 지도'로 보았다. 계절별 창고 유지비, 거래처별 외상 기간, 운송비 대비 매출 비율 등을 직접 계산해 메모를 붙였고, 이를 토대로 아버지께 "외상 기한 단축", "비수기 재고 조정" 등 개선안을 제시했다.

1960년 3월, 이러한 분석 능력과 성실성을 인정받아 중부권 사업부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중부권은 대전·청주·옥천 등을 포함한 충청권 핵심 물류 거점으로, 남북 물류의 허리를 담당하는 전략 지역이었다.

사업부장 시절 그는 직접 트럭에 동승해 지방 창고를 돌며 재고를 점검하고, 거래처를 찾아다니며 미수금을 회수했다. 영업사원들이 "회장 아들이 아니라, 계산기 들고 다니는 영업사원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현장을 자주 찾았고, 계약서 한 장을 쓸 때도 거리와 운송비, 거래처 신용도를 따져 조건을 조율했다.

1962년, 동생 김정성의 사망은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김선우 회고록에 따르면 "정성이 병실을 지킨 건 나보다 정한이었다. 대전·청주 출장을 마치고도 밤마다 병실에 들렀다"고 회상했다. 김정성 사망 이후 그룹 사명이 '한성'에서 '한민'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김정한은 "어린 시절 기억이 담긴 이름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고 훗날 말했다. 그럼에도 중부권 사업부장으로서 그는 '한민'이라는 새 사명을 지방 거래처에 알리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거래처 신용 등급제를 도입해 회수 가능성이 낮은 거래처에 대한 공급 조건을 조정하고, 고신용 거래처에는 결제 기일 연장을 허용하는 등 '숫자 기반 영업관리'를 시도했다. 이는 훗날 한민그룹 재무 관리의 기초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민그룹 영업본부장 시절

1966년 신년 정기 인사에서, 6년간의 중부권 사업부장 생활을 마친 김정한은 그룹 영업본부장으로 승진했다. 유통, 도매, 물류, 신규 거래처 개척 등 그룹 전체 매출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1966년 3월, 서울 출장 중 청계천 근처 도매업자와 차를 마시던 그는, 직원 12명 규모의 소규모 상호신용보험사 '동민상호신용보험'이 매각을 추진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즉시 이 정보를 본사에 타전했고, 김선우는 "물류만으로는 평생 2류다. 금융을 해야 1류다"라며 인수 검토를 지시했다. 두 달 뒤 한민그룹은 해당 회사를 인수해 '한민생명'으로 사명을 변경했고, 김정한은 인수 실무와 전국 영업망 확장을 총괄하게 된다.

그는 한민유통 거래처와 한민생명 단체보험을 묶는 '패키지 계약'을 시도했다. 물건 공급 계약 시 일정 수준 이상의 단체보험 가입을 조건으로 넣어 거래처 충성도를 높이려 한 것이다. 일부 소매상들의 반발과 "보험 장사까지 한다"는 비판이 있었으나, 장기적으로는 그룹의 안정적인 보험료 수입과 거래처 관리에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다.

1968년에는 보험만으로는 그룹의 금융 포트폴리오가 제한적이라는 이유로 증권업 진출을 건의했다. 그는 "공급 대금 결제가 늦어지는 문제를 시장 자금 조달 구조와 연결해서 봐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청산 절차에 들어간 충무로의 한 중소 증권사를 인수해 '한민증권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했다.

영업본부장 시절의 그는 '계산기 영업맨'이라는 별명답게, 술자리보다는 흑판과 분필을 즐겨 사용했다. 지방 지사 순회 시 영업사원들을 모아놓고 "거래처별 매출·수금 회전율"을 직접 계산하며 "장부가 곧 영업"이라는 메시지를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 감을 통해하는 영업에 익숙했던 일부 영업 인력과 마찰을 빚었으나, 영업본부의 손익 구조를 수치화한 첫 시도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룹 부회장 시절

1970년 7월, 김선우 회장이 고지혈증 악화로 쓰러지면서 그룹 경영 구조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김선우 회장은 장남 김정한을 그룹 부회장으로, 삼남 김정우를 그룹 사장으로 승진시켜 '재무·본사 중심 장남과 현장·신규 사업 중심 삼남'이라는 이원화 체제를 구축했다.

부회장이 된 김정한은 첫 전략회의에서 "확장보다 안정"을 기조로 내세웠다. 그는 각 계열사에 예산 집행 계획서와 비용 절감안을 제출하게 했고, 그룹 차원의 자금집중관리에 가까운 구조를 만들었다. 여기서 만들어진 중앙 재무통제 시스템은 훗날 KM그룹 CFO 조직의 원형이 되었으나, 동시에 이후 비자금 조성 의혹이 불거질 때 "자금이 한 곳으로 몰리는 구조가 악용됐다"는 비판도 받게 된다.

1972년, 박정희 정부가 대기업의 전자 산업 참여를 독려하자 김선우는 성남 일대 토지를 매입해 전자사업 진출을 추진했다. 한민전자 설립 과정에서 김정한 부회장은 "초기 설비투자와 부품 공급 계약에서 확실한 마진 구조를 확보해야 한다"며 신중론을 폈고, 김정우 사장은 "전자산업은 국가가 키우는 산업이니 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선점해야 한다"며 공격론을 폈다. 이때부터 두 형제의 경영철학 차이가 본격적으로 표면화되었다.

1974년 이후 그룹이 백화점·관광호텔 사업 진출을 논의하자, 김정한은 기존 유통 데이터와 소비 패턴을 분석한 시장 타당성 보고서를 작성해 수원 매교동 한민백화점 1호점, 청량리 한민관광호텔 설립에 관여했다. 다만 그는 대규모 차입을 동반하는 건설업 진출에 대해서는 끝까지 부정적이었고, 1975년 한민건설 출범 당시에도 "시공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정부 공사 수주에 뛰어드는 것은 위험한 모험"이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김선우김정우의 강력한 의지로 한민건설이 출범했고, 논산훈련소 관사 신축 프로젝트가 성공하며 김정우 사장의 입지는 크게 강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정한은 건설 예산을 삭감하는 등 견제에 나섰다가, 오히려 "현장을 모르는 탁상 공론"이라는 내부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회장 직무대행 시절

1977년 1월 14일, 김선우 회장이 57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1977년 1월 19일 긴급 이사회가 열렸다. 당시 비서실장 조항락의 주도로 "경영 공백 최소화"를 명분으로 김정한이 회장 직무대행으로 추대되었다. 공식 회장 승계 여부가 정해지기 전까지의 '과도기 리더십' 성격이었다. 또한 김선우 회장은 조항락 비서실장에게 "너가 봤을때 더 잘할거 같은 놈한테 물려줘라"라고 말해

회장 대행에 취임한 그는 첫 지시로 전 계열사 예산 20% 일괄 삭감을 강행하며 강도 높은 긴축경영 체제를 선언했다. 1970년대 한국 경제가 고도 성장기에 접어든 상황에서, 다른 재벌들이 공격적으로 투자에 나서던 것과는 정반대의 행보였다. 그는 "성장은 선택이지만, 현금흐름은 생존"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이 일괄 삭감 조치는 특히 막 출범한 한민건설에 치명적이었다. 논산훈련소 프로젝트 이후 후속 수주를 위해 입찰 준비에 한창이던 한민건설은, 예산 축소로 대형 프로젝트에 필요한 인력·장비 투자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결국 성수대교 개발 공사 수주에 실패했다. 당시 한민건설 사장과 김정우 사장은 "건설만이라도 예산을 원상복구해 달라"고 호소했으나,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77년 10월, 그는 일본 노무라 계열 금융기관의 제안으로 막대한 그룹 자금을 단기 고수익 외화 회사채에 투자했다. 경영실과 재무팀이 환위험 및 발행사 신용도 문제를 들어 반대하자, 그는 경영실장을 해임하면서까지 프로젝트를 밀어붙였다. 그러나 투자 대상 회사가 파산하면서 당시 기준 100만 달러(현재 가치 약 600만 달러)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고, 이 손실을 숨기기 위해 계열사 간 자금 순환이 동원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언론 로비를 통해 초기에는 보도를 막았지만, 1년 뒤 일부 내용이 흘러나오며 그룹 신뢰도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사건 후 내부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는 "시장 리스크였지 내 책임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했고, 이 발언은 현재까지도 "책임 회피형 오너"의 상징처럼 회자된다.

1978년에는 그룹 장악을 위해 부친 시절부터 함께했던 원로 임원 7명을 강제 전보 및 해임하고, 자신의 측근을 주요 보직에 앉혔다. 이 과정에서 당시 물류부문 임원이었던 주현인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계열사 자금 순환 구조가 회사채 손실 은폐와 비자금 조성에 악용됐다"고 폭로했다. 이 폭로로 인해 금융당국의 조사 가능성이 거론되자, 이사회 내부에서도 "더 늦기 전에 리스크를 차단해야 한다"는 기류가 커졌다.

1979년, 그는 한민관광호텔 청량 인근 부지를 정계 로비를 통해 저가 매입한 뒤, 해당 부지를 공공사업 부지로 지정받고 한민건설이 수주하도록 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토지 매입 과정과 입찰 과정이 언론에 보도되며 '관급비리' 의혹이 불거졌고, 결국 1979년 7월 3일 이사회에서 그의 부회장 및 회장 대행 해임안이 상정되었다. 표결 결과 찬성 11표, 반대 2표로 해임안이 통과되었고, 며칠 뒤 김정우 사장을 회장으로 선임하는 안건이 만장일치로 통과되면서 그의 경영 일선 생활은 막을 내렸다.

훗날 그는 이 시기를 두고 "그때 손실만 안 났어도, 형제 사이가 이렇게까지 깨지진 않았을 것"이라며 후회했으나, 구체적인 책임에 대해서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 출국 =

1979년 7월 이사회 해임 직후, 그는 같은 해 9월 1일 미국 LA로 출국했다. 그룹은 "건강 악화로 인한 장기 요양"이라는 공식 입장을 냈고, 출국은 언론에 거의 노출되지 않은 채 조용히 이루어졌다.

LA에 정착한 그는 초기에는 한인 사업가들을 상대로 한 소규모 경영 컨설팅 회사를 운영했으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사실상 은퇴 상태에 들어갔다. 주변에서는 그가 미국 이름 'John Kim'을 사용하며, 한인 사회에서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과거 재벌 2세 이력을 감추려 했다고 말했다.

1985년 4월, 함께 거주하던 부인 임지연이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큰 상실감을 겪었다. 이후 한동안 교회와 집을 오가는 최소한의 생활만 유지했고, 이 시기 신앙에 깊이 기울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LA 한인 교회 장로들은 "늘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예배만 드리고 바로 사라지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1993년 가을, LA 한인 미술관 후원 행사에서 미술관장 한세령을 만나 1년여 교제 끝에 1994년 9월 베벌리힐스 근교 한 교회에서 비공개 결혼식을 올렸다. 한국에서는 가족 중 유일하게 김정우 회장과 김보라 여사가 참석해, 일부 언론이 "형제 화해의 신호"라고 보도했지만, 이후 경영 복귀나 귀국 시도는 없었다.

2000년대 들어 그는 LA 한인타운 인근 고급 주택가에 거주하는 모습이 간헐적으로 한국 언론에 포착되었다. 한세령과 함께 미국 미술계 후원, 한인 골프 모임, 장학재단 활동 등에 참여했으며, 전처 소생 자녀 셋과도 일정한 거리에서 왕래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공식적인 인터뷰나 공개 석상 발언은 극도로 자제했다.

2010년 KM 경영권 불법 승계 사건이 터지자 여러 언론에서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그는 "이미 회사를 떠난 지 30년이 넘었다"며 모두 거절했다. 2014년 김정우 회장이 타계했을 때에도 직접 장례에 참석하지 않고, 그룹 비서실 앞으로 짧은 편지 한 통을 보내는 것으로 조의를 대신했다. 편지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비서실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형제 간의 마지막 인사"였다고 전해진다.

회장 대행 해임 이후 41년간 침묵을 지키던 그는 2020년 9월 12일, 《재외동포신문》과의 단독 인터뷰를 통해 처음으로 해임과 가족, KM그룹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공개했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선택을 "도망"이라고 표현하며, 김정우 회장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사망

2025년 3월 7일 오전 6시 10분(현지시간), LA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공식 사인은 노환 및 만성 심부전 합병증으로 알려졌다.

생전 유언에 따라 유해는 한국으로 옮기지 않고, LA 인근 가족묘역에 안치되었다. 장례는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만 참석한 가족장으로 치러졌으며, KM그룹은 장례 비용을 지원하고 조문단을 파견했다. 김태연 회장을 비롯한 주요 일가가 LA로 출국해 장례에 참석했고, 한국에서는 KM그룹 명의의 간단한 부고와 애도문만 발표되었다.

그의 유언장에는 "빈손으로 떠나는 것이 조금은 마음을 가볍게 한다. 자식들에게는, 내가 남긴 재산보다 내가 남긴 실수를 더 깊이 기억해 달라"는 문장이 담겨 있었다고 전해진다. 모든 재산은 LA 지역 한인 장학재단과 미술관, 소속 교회에 기부되었으며, KM그룹 측은 "관련 재단과의 협의를 거쳐 별도의 기념 사업은 추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평가

공과에 대한 평가

긍정적으로는 한성유통 시절부터 영업·재무 데이터를 중시하며 유통 기업이었던 그룹을 금융·서비스로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이 꼽힌다. 한민생명, 한민증권 인수는 훗날 KM그룹 금융 계열의 뿌리가 되었고, 거래처 신용 등급제나 영업 손익 관리 체계는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시도였다는 평가다.

반면 회장 직무대행 시절의 일괄 예산 삭감, 무리한 외화 회사채 투자, 정경 유착 의혹과 비자금 논란은 그의 경력을 사실상 '실패한 2세 경영자'의 대표 사례로 만들었다. "숫자를 잘 봤지만, 숫자 뒤에 있는 사람과 정치·사회 환경을 끝까지 보지 못했다"는 평이 상징적이다.

재계·학계의 시각

재계에서는 그를 두고 "유통·금융으로는 유능했으나, 제조와 건설, 정치 리스크를 감당할 그릇은 아니었다"는 평가와 "부친의 카리스마와 동생의 실행력을 동시에 가지지 못한 과도기 리더"라는 평가가 공존한다. 일부 경제사 연구자들은 그의 사례를 '한국식 재벌 2세 리스크'의 전형으로 다루며, 짧은 준비 기간·권한 대비 책임 의식의 부족·정치 및 금융 네크워크에 대한 과신을 복합적인 실패 요인으로 지적한다.

그룹 내부의 평가

한민그룹 시절인 1984년 공식 사사 초기판에서는 김정한을 "부회장 및 회장 직무대행 역임"이라는 짧은 문장으로만 언급되었으나, 2024년에 개정된 70년사에서는 한 챕터 분량으로 공과를 다룬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 인재개발원 임원급 리더십 교육에서는 "김정한–김정우 형제" 사례를 통해 '오너 일가의 역할 분담'과 '책임 있는 리스크 테이킹'의 중요성을 교육용 사례로 활용하고 있다.

가족 내에서는 "엄격하지만 마음이 여린 장남"으로 기억되며, 일부 자녀와 조카들은 "사업가로서는 실패했지만, 아버지와 삼촌으로서는 늦게나마 솔직해지려 했던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다만 동생인 김정우 회장과의 관계는 생전 끝내 완전한 화해로 이어지지 못했고, 이는 후대에게도 씁쓸한 교훈으로 남았다.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