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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아버지 김준봉은 그를 농사꾼으로 키우고자 했으나, 김선우는 일찍이 상업과 기계에 대한 관심을 품고 있었고, 이로 인해 부친과의 갈등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길을 고집하며 현실을 뚫고 나아가기 시작한다. | 어릴 적부터 아버지 김준봉은 그를 농사꾼으로 키우고자 했으나, 김선우는 일찍이 상업과 기계에 대한 관심을 품고 있었고, 이로 인해 부친과의 갈등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길을 고집하며 현실을 뚫고 나아가기 시작한다. | ||
1941년, 김선우는 21세의 나이로 당시 지역에서 규모가 컸던 | 1941년, 김선우는 21세의 나이로 당시 지역에서 규모가 컸던 제방상회에 배달원으로 취업했다. 그는 성실한 태도와 뛰어난 눈썰미로 빠르게 사내의 주목을 받았고, 결국 1945년, 제방상회 사장 이복래의 신임을 얻어 회사 임원으로 승진하게 된다. | ||
이때는 마침 해방을 맞이한 시기였고, 나라가 새로운 질서를 준비하던 시점이었다. 김선우는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상업과 유통이 새로운 미래임을 감지했다. | 이때는 마침 해방을 맞이한 시기였고, 나라가 새로운 질서를 준비하던 시점이었다. 김선우는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상업과 유통이 새로운 미래임을 감지했다. | ||
2025년 7월 8일 (화) 07:5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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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M그룹 창업주 김선우 金善宇 | Kim Seon-woo | |
|---|---|
| 출생 | 1920년 3월 13일 |
| 경기도 수원군 (現 경기도 수원시) | |
| 사망 | 1977년 1월 14일 (향년 57세) |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천추각 | |
| 국적 | |
| 본관 | 김해 김씨 |
| 호 | 건산(建山) |
| 학력 | 수원거류민소학교 졸업 수원고등농림학교 졸업 |
| 부모 | 아버지 김준봉, 어머니 이태순 |
| 형제자매 | 5남 4녀 중 장남 |
| 배우자 | 이해린 |
| 자녀 | 장남 김정한 차남 김정성 삼남 김정우 장녀 감자영 차녀 김자순 |
| 경력 | 제방상회 배달원(1941~1945) 제방상회 부사장(1945~1954) 한민유통 사장(1954~1977) 장녀 감자영 차녀 김자순 |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KM 창업주.
생애
유년~청년기 시절
김선우 초대 회장은 1920년 3월 13일, 경기도 수원군 매탄리(현 수원시 매탄동)에서 태어났다. 대지주였던 김준봉의 5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매탄리 일대의 대부분 토지를 소유했던 부친의 덕분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 김준봉은 그를 농사꾼으로 키우고자 했으나, 김선우는 일찍이 상업과 기계에 대한 관심을 품고 있었고, 이로 인해 부친과의 갈등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길을 고집하며 현실을 뚫고 나아가기 시작한다.
1941년, 김선우는 21세의 나이로 당시 지역에서 규모가 컸던 제방상회에 배달원으로 취업했다. 그는 성실한 태도와 뛰어난 눈썰미로 빠르게 사내의 주목을 받았고, 결국 1945년, 제방상회 사장 이복래의 신임을 얻어 회사 임원으로 승진하게 된다.
이때는 마침 해방을 맞이한 시기였고, 나라가 새로운 질서를 준비하던 시점이었다. 김선우는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상업과 유통이 새로운 미래임을 감지했다. 이후 이복래 사장에 신임을 받으며 계속해서 승진을 거듭하며 제방상회를 성장시켜가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김선우는 평소처럼 출근하여 제방상회를 오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북한군의 남침 소식은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시장은 혼란에 빠졌고, 사람들은 제방상회로 들이닥쳐 곡물이며 비누 한 장이라도 더 쥐려는 눈빛으로 가게를 헤집었다.
이때, 김선우는 2층에 있던 이복래 사장을 깨우고 2층 금고에서 모든 돈과 문서를 가지고 이복래 사장에게 본인에 가족과 함께 피난을 가라고 했고, 본인은 계속 제방상회에 남아 가게를 지키겠다고 했다. 훗날 이때 이복래 사장이 이 모습에 감동하여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싼 가격에 김선우에게 가게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며칠 뒤,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수원은 곧 전선이 되어버렸고, 군인들과 피난민들이 끝없이 밀려왔다. 김선우는 이때도 매일 밤 창고 앞에서 가게 문을 지켰다. 그러나 전쟁은 상점을 지키겠다는 의지 하나로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달 뒤, 군 작전으로 수원 전역이 강제 철수 지역으로 지정되었고, 결국 제방상회도 문을 닫게 되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대전-보은-함양을 거쳐 부산까지 가는 피난길에 올라야만 했다.
부산에서도 김선우는 물자 교환, 생필품 조달 등 생존에 필요한 실용 감각을 발휘했다. 특히 미군 부대와의 접촉을 통해 남은 군수물자를 들여와 주민들과 나누는 일을 도맡으며, 자연스럽게 물자의 흐름에 대한 감각을 쌓아갔다.
한성유통 사장 시절
1954년 한국전쟁의 종전 직후, 김선우는 고향 수원으로 돌아온다. 전쟁으로 인해 제방상회는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전후 복구와 함께 외국에서 수입되는 각종 물자가 쏟아지던 시기, 그는 외국 물품의 유통에 가능성을 발견한다. 셈이 빨랐던 김선우는 가게를 인수하여 본인이 직접 운영하고자 생각했고 아버지에게 찾아가 당시 돈으로 40만환을 빌렸다. 이후 이복래 제방상회 사장을 찾아간 김선우는 제방상회를 25만환에 인수하겠다고 했고, 이복래 사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장남과 차남에 이름을 따와 한성유통으로 이름을 바꾸어 1954년 7월, 수원군 매탄리에서 한성유통을 개업한다. 이것이 훗날 KM그룹의 시초이다.
휴전 직후 남한 전역에는 미군의 잔여 물자, UN 구호품, 일본 및 홍콩발 소비재가 쏟아져 들어왔다. 당시 대부분의 상인들은 무분별하게 물자를 받는 족족 팔아치웠지만, 김선우는 어느 지역에 어느 물품이 필요한지 매일 노트에 정리하며 공급망과 수요를 정확히 읽었다. 그는 비누, 담배, 구호쌀, 면직물 등의 생필품은 일괄 수입하여 도 단위로 재분배하였꼬 미군 PX 잉여물자는 전쟁 당시 부산에서 미군과 접촉했던 방식과 인맥을 활용하여 중간 도매 없이 확보했다. 또한 지방 소도시 상점들과 직접 찾아다니며 유통 계약을 맺고 소형 도시 간 유통망 네트워크를 구성했다.
1956년 4월, 그는 수원-인천-대전을 잇는 첫 물류 루트를 지인 이성태에 의해 처음 구축하게 된다. 그는 미군기지에서 미군 5톤 트럭 1대를 중고로 구매하고 운전사 2명을 직접 고용하여 도로를 달리며 전국을 누볐다. 이때에도 김선우는 운전사만 보내는 것이 아닌 본인이 직접 조수석에 타 함께 다니며 물류 시간표를 손수 기록했다.
1958년이 되면 서울, 대전, 대구, 광주에도 도매 또한파트너를 확보한 그는 대전에 땅을 사들여 한성유통1창고, 한성유통2창고를 세우며 지방 상권의 허브로 성장해나간다. 이때부터 김선우의 한성유통은 지방의 쇄상이 아닌 전국의 유통가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1959년, 이때부터 자녀들도 경영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장남 김정한에게 한성유통 수원본사 회게과장 자리를 준 김선우는 장남에게 한성유통 수원본사 경영을 맡기기 시작한다. 당시 20살이던 김정한은 삼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하나도 몰랐던 그에게 회계과장 자리를 물려준 것은 도박에 가까웠다. 그리고 김정한은 아버지에게 "시장도 다녀본적이 없고 회사도 운영할 줄 모릅니다"라고 하자 김선우는 "직접 부딪히면서 처음부터 배워라, 하면 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정한은 의외로 회계과장 일을 잘 소화해냈고 심지어 수익 흐름과 비용 구조를 정밀하게 분석하여 아버지에게 매일 밤 찾아가 회사에 수익을 망치는 것을 사실대로 말해주었고, 또한 돈을 줄여도 될 곳도 거짓없이 말해주었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1960년 3월, 21살이 된 김정한에게 한성유통 중부권 사업부에 부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김정한은 중부권 사업부장 자리를 잡자마자 대전, 청주, 옥천 등의 재고 관리, 물류 계약, 지방 수금 및 재납품까지 도맡게 된다.
1960년에 한성유통은 전국 지부 15개, 수익 12배 성장, 전국 8개 주요 도시 거래 호가보, 직원 80명 돌파라는 성과를 달성하며 기존 수원을 넘어 영남과 충청의 유통 허브의 1인자가 된다.
한민으로 그룹명을 변경하다
1962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으로 인해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던 시점, 김선우 회장은 사업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다. 유통 사업을 하며 친해진 미군 리처드 도슨 소령의 추천으로 미국에서 낡은 기계들을 들여오게 된 그는, 이를 직접 수리하여 재판매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게 되는데 김선우의 둘째 아들이었던 김정성이 22살의 나이로 병환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김선우는 둘째 아들 김정성을 "조용했지만 따뜻한 아이였다"라고 회고록에 회고했다. 장례가 끝난 이후 회사 사명을 한성에서 한민으로 변경한다고 발표했다.
“나는 이제 내 이름이나 내 자식의 이름보다,
이 나라의 이름과 이 백성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한민’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하루를 나누는 유통인이 되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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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3월, 동아일보 1면 |
그는 한성기계라는 회사를 새롭게 설립하였고, 이를 통해 본격적인 경공업 중심의 기계 유통 및 제조업으로 진입하게 된다.